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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70] 요단 강가에 서서(여호수아 3:1-6) 본문

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70] 요단 강가에 서서(여호수아 3:1-6)

En Hakkore 2024. 2. 14. 11:42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겠느냐"(창 24:58).

그녀 스스로 자유로이 의도적으로 결단해야 했다. 복음의 요건이 제시하는 대로 죄인에게 바로 그런 개인적이 단호한 결단이 요구된다. 도덕적인 행동자로서 자신의 책임을 시험하고 행동하도록 촉구한다.

"가겠나이다."

그녀는 기꺼이 응낙하고 자신의 옛 삶에 등을 돌렸고, 자신의 가족을 버리고 이삭의 아내가 되었고(67절). 그런 자신의 결단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그 백성을 영원히 사랑하시는 주 예수님과 영원한 언약을 맺는 영혼의 위대한 모형이요 그림이다.🫰

우리 주님이 친히 복음의 질서에 대해 주신 다음의 말씀도 창세기 24장의 이 놀라운 모형과 완전히 일치한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 22:2).

이에 대해 헨리(Henry)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복음 언약은 그리스도와 신자 간의 혼인(결혼) 언약이니,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혼인이다. 이 직유적인 표현은 언급되기만 할 뿐 여기서 시행되는 것이 아니다".

곧, 그 혼인 잔치와 그 하객들은 후에 가서 주로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혼인"의 모형 자체의 의미에 대해 토마스 스코트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말씀한 바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심으로써 사람과 연합하심, 그분이 그분의 교회와 그 각 구성원을 사랑의 관계 속으로 받아들이심, 이 신성한 관계로 말미암아 그들이 누리는 신령한 존귀와 풍성함과 복, 그분의 자기를 낮추시는 신실한 사랑으로부터와 그와의 하나된 교제로부터 그들이 얻는 바 위로, 그리고 그와의 관계로 말미암아 그들이 지게 되는 상호적 의무 등, 이 모든 것이 이 혼인이라는 은유를 통해 암시된다".

그러나 대다수의 설교자들은 습관적인 편파성과 균형의 상실로 인하여 이 중 앞의 네 가지만을 주로 다루고, 그 관계에 내포되어 있는 "상호적 의무"에 대해서는 치명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바로 그것에 대해 강조한다.

마태복음 22:11("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에 대한 설명에서도 똑같이 한쪽으로 치우친 점이 다시 나타난다. 토마스 스코트의 다음과 같은 설명이 지극히 옳다.

"이는 참된 신자가 누군가가 복음의 잔치에 환영받는 손님으로 가장하고 그 지극히 신성한 규례에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의 다음 논평은 요점을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예복을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로 보느냐, 아니면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둘 다 필수적이며 언제나 함께 가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 편에서의 일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책임과 그 실패를 드러내는 것이다. 3, 5, 6절은 인간의 완악함과 적개심을 보여 주고, 11절은 헛된 고백이 드러나는 것을 그려준다.

"복음이 혼인 잔치라면, 예복은 복음과 또한, 복음에 대한 입술의 고백에 합당한 마음의 상태와 삶의 모습을 지칭한다."(헨리 Henry).

많은 이들이 마음과 삶의 새로움이 전혀 없이 복음을 시인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했음을 주장한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계명에 합당한 기질과 행위가 없다. 일상에 나타나는 실천적인 거룩이 전혀 없다. 이들은 혼인의 "증서"가 없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체험적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고, 그 분과 확실하고도 엄숙한 언약을 맺었고, 그리스도-이분은 여호수아의 원형(anti-type)이시다-의 계명에 따라 처신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을 위해 예비하신 그 유산에 들어갈 수도, 누릴 수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여기 여호수아 3, 4장에서 그리는 위대하고도 고귀한 진리이다.

이것이 과연 중요한 것인데도 오늘날 이를 거의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본문에 대해 이렇게 길게 수고롭게 말하는 것이다.🌱

중생 때에 영혼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며, 이때에 하나님의 권능의 주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아-여기서 우리는 전적으로 수동적이다-영적으로 살아나 그에게로 돌이킬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 은혜의 이적은 그 수혜자가 일깨움을 받아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끔찍한 적개심을 지각하는 데에서, 그의 양심이 자신의 죄책과 버려진 처지를 깨닫는 데에서, 그의 애착이 죄에 대해 거슬림을 갖게 되어 이제 그것을 혐오하게 된 데에서, 그의 의지가 하나님 쪽으로 기우는 데에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순전한 회심 혹은 돌이킴-즉, 자신의 악한 길을 버리며, 자신의 우상들을 버리며, 세상으로부터 돌아서며, 그리스도를 자신의 절대적인 주요, 전충족적인 구주요 영원한 분깃으로 취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회심-이것 외에는 구원 얻는 회심이란 없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이요, 그와 혼인하며, 그와 연합한다. 고린도 교인들의 회심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는 것을 본다.

즉, 그들 자신을 주께 기꺼이 기쁨으로 내어드렸으며-주의 소유권과 권위의 정의로운 요구 사항들을 시인하고서, 또한 스스로 결코, 갚지 못할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주의 구원을 베푸시는 사랑이 제기하는 요구 사항들에 응답했으며-그들 자신을 주의 종들에게 주어 그들에게서 지도를 받았다.

이것은 세례로써 확증된다. 세례 시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의 백성들에게 공개적으로 내어주니 말이다. 바울은 그렇게 회심한 자들에게 약간 다른 비유를 통해 이를 상기시킨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사도는 그들과 그리스도 사이에 혼인을 통한 연합과도 같은 연합을 이루는 도구의 역할을 했는데, 헌신, 충절, 사랑의 순종이 바로 그 연합의 의무 사항이다. 사도는 그 연합을 보존하고 증진시키는 일을 위해 그들을 위하여 경건한 질투심으로 수고한 것이다.

중생 시에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본질적으로 연합하게 하시며, 회심시에 우리가 개인적으로 실천적으로 우리 자신을 그에게 온전히 드린다. 회심이란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남편이요 주로 맞아들이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에게서 다스림과 보호하심을 받게 된다.

회심이란 그리스도께서 그분이 우리의 유일한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그분의 신실한 백성이 되도록 그분과 언약을 맺는 것이다.🌱

언약의 관계가 혼인의 연합이라는 사실은 예레미야 31:32, 호세아 2:18-19(참조, 렘 2:2; 겔 16:60)등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가리켜 흔히 (영적)간음으로-다른 신들을 좇아감으로써 여호와를 저버리는 것으로-간주한다.

회심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언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대한 문제는 바로 "그분의 언약을 지키는 것"이다(시 25:10). 즉 어느 때에든지 그 요건들에 준하여 행한다. 아니면, 회심이 그 의무를 다하는 아내가 그 남편에게 하듯 행하는 데에 있다. 이 모든 것이 다음의 포괄적인 말씀으로 정리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 2:6).

곧, 너희가 시작한 그대로 계속 행하고, 너희가 처음 그에게 굴복할 때와 동일한 동기와 원리들에 준하여 처신하고, 너희의 회심이 너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통해 영구히 실현되게 하고, 전적으로 그에게 헌신하라는 것이다. 아멘!

지금까지 참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의와 묘사로 여러분 앞에서 제시하고자 애쓴 내용이 바로 여호수아 3, 4장에서 모형적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