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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론 (Sanctification)

[성화론 33] 성화론의 특성(1)

En Hakkore 2024. 3. 25. 11:28

둘째로, 성경적 성화는 성도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질질 끄는 과정이 아니다.

장차 올 진노로부터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그로 하여금 영원한 영광을 즐길 수 있는 적합한 자가 되게 한다. 어느 시점에서 회개하는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 살기에 합당하지 못하였는가? 그가 집에 돌아와 그의 죄를 고백하자마자 최고의 옷이 입혀졌으며 반지가 그 손에 끼여졌다.

그의 발에 신이 신겨졌고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려졌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거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 15:23-24).

만일 영혼이 하늘에 거하기 합당한 존재가 되기 위하여 성령의 점진적인 역사가 필요하다면 십자가상에서 죽어가는 강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첫 순간에 낙원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에서 보듯이 세 가지는 분리되어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

셋째로, 성경적 성화는 육적 속성을 박멸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완전주의자들의 가르침은 헛된 망상 속에서 영혼을 강퍅하게 한다. 악을 선한 것으로 말한다든지 자신들이 죄 짓는 일을 대수롭게 생각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올바른 길에서 거룩을 추구하려는 신실한 영혼들의 수고를 좌절케 한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를 헛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거룩을 획득하고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죄악이 많고 완전함과는 거리가 먼 자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많은 영적 훈계들을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전락시킨다,

예를 들어 로마서 6:12, 고린도후서 7:1, 에베소서 4:22, 디모데후서 2:22절의 말씀들의 가르침을 무용지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젊은이의 정욕을 피하라"는 말씀은 경건한 디모데 속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들임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볼 때 과연 그리스도인에게서 육적인 속성이 어디로 사라졌는가? 성도는 죄를 고백한다(요일 1:9). 신자로서 해야 할 의무들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존재가 되지 못하다고 여긴다. 죄 때문에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욥 40:4), 죄 사함을 위해 진지하게 간구하며(마 6:12), 경건한 슬픔으로 죄를 탄식한다(고후 7:10).

죄로 인한 징계를 기꺼이 수용하고(히 12:5-11), 그 징계를 인하여 도리어 하나님을 높인다(시 119:75). 하나님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의 제사를 드린다(시 51:17)

넷째로, 성경적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객관적인 무엇이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떤 무엇도 결코 아니다. 죄가 없는 완전주의로 나가기는커녕 정반대로 극단적인 상황에 떨어지는 경우들이 있다. 도덕률 패기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룩이 보다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급진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고 반박한다.

이것은 사단의 또 다른 속임수이다. 이것이 분명한 속임수인 것은 사단은 성도가 가진 유일한 거룩함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하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거룩함, 청결한 심령과 의로운 길을 가는 것과 상관이 없는 거룩함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육신을 즐겁게 하는 가르침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한 행동은 정죄로부터 영원히 면제를 보장한다. 그리고 평생 동안 죄를 탐닉하는 것을 면하게 해 준다. 구원받은 믿음은 오직 경험적인 경건과 개인적인 경건의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음으로 말미암아 참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Arthur W. Pink 성화론 p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