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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론 31] 성화론의 문제해결(2_장문) 본문

성화론 (Sanctification)

[성화론 31] 성화론의 문제해결(2_장문)

En Hakkore 2024. 3. 25. 11:27

앞의 마지막 네 문장은 존 오웬의 글로부터 압축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결케 되고 거룩한 자가 곧 그들 자신이며 그들 속에 여전히 부패의 뿌리가 깊이 잔재해 있다는 것을 절감하는 자들이요, 그들을 더럽히는 일들이 솟아나고 더러움을 생산해 내는 자들 역시 자기 자신들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오염들을 몹시 슬퍼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 것으로 탄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가진 화평을 깨버린 것으로 인해 무척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죄를 죽이려는 노력에 힘을 쏟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목할 만한 확정적인 증거는 가장 경건하고 거룩한 자가 자신의 죄악들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단언하면서 몹시 애통해하는 고백을 한다는 사실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천한 자로 고백하는(욥 40:4) 그런 자를 직접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욥 1:8)라고 선언하셨다.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다'고 고백하는 다니엘을 하나님은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이라고 말씀하셨다(단 10:8, 19). 삼층천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땅으로 돌아온 자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고 절규하였다(롬 7:24).

가장 탁월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 중에 몇 사람의 고백을 인용한 구절들에서 순전한 심령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자신을 모든 죄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롭게 된 자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분들의 언어조차도 육적 본성이 이생의 삶으로부터 온전히 삭제되었다는 유토피아적인 이론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사단에 의해서 온전히 눈이 먼 자들만이 그처럼 불합리하고 멀쩡한 거짓말이 어디 있냐고 항변할 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순전한 마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경적인 가르침에 따라 내리는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이 점을 제공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악을 물리쳐야 하고 방어해야 할 것이다. 공허한 고백자들이 안심하고 머리를 눕힐 수 있는 베개를 마련해야 하고 중생한 자에게 죽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첫째로, '순전한 마음'(pure heart)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경험한 자이다(딛 3:5).

이것은 중생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신앙 생활을 통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유지된다. 여기에 내포된 모든 것을 우리가 길게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그것은 신자들의 이해력의 정결함이 포함된다. 그리하여 사단에 의해서 더 이상 가려지는 치명타는 입지 않는다. 성령에 의하여 초자연적으로 조명함을 받는 이해력이다. 결과적으로 세상적인 것들이 다 헛되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지성은 오류의 오염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 역시 부정적으로 정서의 정결함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하여 죄가 더 이상 사랑스럽게 여겨지지 아니하고 몹시 싫은 것으로 다가온다. 하나님은 더 이상 움츠러들거나 피할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추구하며 사모하는 대상이 된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중생할 때 순결한 욕망, 순결한 의지 및 순결한 행동의 동기들이 포함된 속성이나 원리가 영혼에게 전달된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심겨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어진바 된다. 그 결과 영혼은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며 그의 뜻에 순종하고자 적극 나서게 되고 모든 일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의 영적인 욕구들을 막는 일들이 벌어지거나 영적인 포부들이 좌절될 때 엄청나게 탄식하게 된다. 순결한 심령은 불결함을 몹시 경멸하며 마음의 가장 무거운 짐은 그가 행하는 모든 일을 더럽히고 지속적으로 곤경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바다 물결이 여전히 속에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순결한 심령은 어리석음과 악한 상상과 악한 욕구들이 있음을 양심 깊이 자각하고 있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교만과 불만을 탄식하고 불신앙과 적대감을 애통해 하며 거룩하지 못한 은밀한 것들에 대하여 눈물짓는 심령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로 순결한 심령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에 악을 깨닫는 자이다(히 10:22).

악한 양심은 사함을 받지 못한 죄이기 때문에 유죄선언을 하며 학대한다. 악한 양심을 가진 자는 심판 날을 예상하며 몹시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생각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을 지워버리고자 추구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를 적용한 자의 양심은 마음에 평안을 얻으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신감을 가진다. 결과적으로 미신과 공포와 고통은 제거되고 하나님께 대한 반감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또한 세 번째로 믿음으로 그들의 심령을 깨끗케 한다(행 15:9).

불신앙은 더럽히는 원리이다. 그래서 믿음은 깨끗케 하는 원리이요 그 깨끗함은 믿음이 굳게 붙드는 목적이기도 하다. 믿음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의 피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함을 실감한다(요일 1:7).

그렇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순결한 심령(pure)을 지닌 자이다. 그러나 모든 성도가 다 정한 마음(clean heart)을 가진 것은 아니다(시 51:10). 성도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은 판단 받지 않은 죄이다(unjudged sin).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깨어진다.♡

오염이 제거될 수 있는 유일한 길과 교제가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참된 회개이다. 우리 자신을 정죄하고 죄를 애통해 하며 죄를 남김없이 고백하며 그 죄로 인하여 다시는 지배되지 않겠다는 굳은 결단과 용기가 이어져야 한다. 잘 알려진 죄를 기꺼이 허용하거나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정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존 오웬이 회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옳다: '회개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영적 생명의 존속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회개와 고백이후에는 죄와 부정한 것을 다 씻어버리는 샘으로(계속해서) 나아가는 새로운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깨끗케 하는 피를 믿는 믿음의 적용이 필요하다. 하나님 앞에 그 피의 공로와 효과를 가지고 간청하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우리의 확실한 보장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충족됨을 만났다. 우리는 빛 가운데서 성도의 유업을 받을 길이 무엇인지를 찾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깨끗케 하시는 피의 모든 가치가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 자신의 속성을 우리에게 전달하시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자로 간주하며 중생으로 우리는 순결한 마음을 받았다. 그 증거로서 비록 우리 안에 죄의 낙을 즐기고자 하는 것이 잔재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든 부정한 일들을 싫어한다.

우리는 우리의 심령을 정하게 함으로 말미암아(시 73:13)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할 수 있다. 계속해서 죄를 죽임으로, 우리 안에서 우리로부터 나오는 모든 죄를 매일 낱낱이 회개함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속시킬 수 있는 것이다.♡

Arthur W. Pink 성화론 p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