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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56] 애굽으로 내려간 요셉(창세기 39장, 40장)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156] 애굽으로 내려간 요셉(창세기 39장, 40장)

En Hakkore 2024. 3. 23. 11:42

창세기 37장은 야곱의 아들들이 이복동생 요셉을 미디안 사람들에게 팔고, 미디안 사람들이 다시 그를 애굽에 판 이야기로 끝난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에 의해 배척을 당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지는 것을 보여준다.

유대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메시야를 빌라도의 손에 넘겨준 때로부터, 이제 한 나라로서 이스라엘은 더 이상 그와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도 그들로부터 이방인들에게로 돌이키셨다. 그와 같이 여기의 모형에서도 그 무대에 있어 중요한 변화가 생긴다.

이제 요셉은 이방인들의 손 안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애굽으로 내려간 요셉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성령은 이를테면 요셉의 원형이 그 땅에 없는 동안의 유대인들의 역사(歷史)를 추적한다. 바로 이것이 창세기 38장이다.

창세기 39장이 유다(Judah)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메시야가 유대인들(Jews)에 의해 배척을 당하기 오래 전에 이미 이스라엘은 - 즉 열 지파는 - 별도의 역사(歷史)를 갖기를 그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기에서 유다는 그리스도를 배척한 이후의 유대인들의 역사(歷史)를 예표적으로 보여 준다.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38:2).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가나안 사람"은 "상인"을 의미하며, "수아"는 "부(富)를 의미한다. 이러한 이름들은 십자가 이후의 유대인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얼마나 잘 나타내는가!

그들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이 정착생활을 하는 농부나 고요한 목자가 아니었다. 대신에 그들은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상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그들이 가장 열망하며 추구하는 것은 부(富)였다. 유다는 수아를 통해 세 아들을 낳았다.

'숫자 성경'(Numerical Bible)은 그들의 이름의 의미와 관련하여 "엘"은 적의(敵意)를, "오난" 은 죄를, 그리고 "셀라"는 싹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름들 속에 얼마나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 주목하라.

그리스도 이후의 모든 세대를 통해 유대인들을 특징짓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적의이다. 또 "죄" 역시 탐욕스러운 유대인들에게 매우 적합한 이름이다. 일반 상인들은 대체로 거짓말과 시기와 속임수를 흔히 사용하지 않는가! 계속해서 "싹"도 유대인들의 연약한 삶을 잘 묘사한다.

그들은 "싹"처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 하나님에 의해 놀랍게 보존되었다. 창세기 38장은 다말의 추잡한 이야기와 함께 끝나는데, 그것은 마지막 때의 유대인들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녀가 해산의 고통 가운데 있을 때, 그녀의 태 안에 쌍둥이가 있었다(38:27).

그와 같이 대환난의 때에 이스라엘에 두 무리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베레스"이다. 베레스는 "불화"를 의미한다. 그는 하나님과 완전히 불화하면서 적그리스도를 영접하며 그에게 경배할 다수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둘째는 "그 손에 홍색 실을 가진" 세라이다(38:30).

그는 구원받을 경건한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 마치 "붉은 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옛 라합처럼 말이다. 이제 창세기 39장을 살펴보도록 하자.

창세기 39장은 단순히 창세기 37장의 계속이 아니다. 그 이상(以上)이다. 창세기 39장은 38장으로 말미암아 37장과 완전하게 분리된다. 창세기 39장은 모형에 있어서의 새로운 시작이다. 그것은 우리를 성육신으로 데려가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양한 경험들을 다양한 각도로 추적한다.♡

26. 요셉이 종이 됨.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창 39:1).

요셉은 아버지의 집의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애굽의 노예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주 예수의 자발적인 비하(卑下)와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나님과 동등되며 그의 본체의 형상인 자는 스스로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빌 2:6, 7).

"노예"가 "종"보다 원어(原語)의 의미를 더 잘 나타낸다. 시편 40편의 예언적인 언어는 이것을 가리킨다. 거기에서 우리는 주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

"주께서 내 귀를 뚫으셨나이다 주는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6-8절, 한글 개역개정판에는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이라고 되어 있음).

아러한 말씀은 우리를 출애굽기 21:5-6로 데려간다.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시편 40편의 예언을 말하는 화자(話者)면서 동시에 출애굽기 21장의 상징을 성취한 자는 다름 아닌 주 예수였다. 그는 자발적으로 종의 위치를 취하고 노예의 자리로 들어가셨다. 요셉이 여기에서 상징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