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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54] 형들에게 배반을 당한 요셉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154] 형들에게 배반을 당한 요셉

En Hakkore 2024. 3. 23. 11:41

17. 요셉은 끝까지 형들을 찾았다.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창 37:17).

요셉이 세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형들이 그곳을 떠난 뒤였다. 이와 관련하여 냅(Knapp)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그의 마음이 아버지가 맡긴 일에 완전히 착념하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은 헤브론으로 돌아갈 좋은 기회였다. 맡은 일을 포기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는 좋은 핑계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맡긴 일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것은 요셉이 예표한 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버지의 잃은 양을 찾는 수고를 끝까지 감당했다. 마침내 찾을 때까지 말이다. 사람들의 외면과 배척과 몰이해까지도 그를 멈추게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경멸하며 배척했으며,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베드로조차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라고 말하며 그의 길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그의 발걸음을 돌이키지 못했다. 그가 행해야만 하는 일이 그에게 맡겨졌으며, 그는 그 일을 "마치기" 까지 쉬지 않을 것이었다.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사복음에 기록된 이야기 전체를 한 문장으로 축약하면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우리의 구속자는 항상 그의 형제들의 뒤를 따라 갔다. 그가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의 글을 읽은 목적이 무엇인가? 두말 할 것도 없이 그의 형제들에게 다가가기 위함이었다.

그는 또한 갈릴리 해변을 다니면서 잠시 동안 자신과 함께 다닐 사람들을 찾으셨다. 또 성경은 그가 사마리아를 통과해야만 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 그것은 거기에 그의 몇 명의 "형제들" 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인자는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사랑하는이여, 이러한 말씀이 당신에게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갔다"는 말씀을 일깨워 주지 않는가? 아, 요셉이 예표하는 자가 얼마나 큰 인내와 오래 참음으로 당신을 뒤쫓아 왔는지 생각해 보라! 얼마나 오랫동안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이 당신을 뒤쫓아 왔는지 생각해 보라! 그 사랑은 불신앙의 산을 넘고 죄의 벼랑을 지나 당신을 뒤쫓아 왔다. 💕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할데만(Dr Haldemann)은 "도단" 이 "율법 혹은 전통"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잠깐 인용해 보도록 하자. "거기에서 예수는 그의 형제들이 율법의 멍에와 종교적 형식주의의 노예 아래 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다, 여호와의 율법은 바리새인들의 "전통" 으로 변질되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막 7:8). 바로 이것이 그들에 대한 우리 주님의 책망이었다.

18. 형들이 요셉을 죽이고자 음모를 꾸밈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창 37:18).

형들의 미움은 그들을 찾는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폭발시킬 기회를 발견했다. 여기에서 요셉을 죽이려는 음모를 "그가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꾸민 것을 주목하라.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 주님이 아직 아기였을 때, 하나님을 대적하는 육신적인 사람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적의(敵意)를 드러냈다.

헤롯이 새로 태어난 구주를 죽이고자 끔찍한 "음모"를 꾸몄다. 그때는 구주가 아직 "멀리 있을" 때였다. 그가 유대인들에게 스스로를 공적으로 나타내기 30년 전이었다.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마 12:14)

19. 형들이 요셉의 말을 믿지 않음.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창 37:19, 20).

요셉의 예언적인 이야기는 그의 형들에게 허튼 이야기로 들렸다. 그들은 그를 미워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말한 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은 "자 그를 죽이자 그리고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 라는 악한 제안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주목해 보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막 15:29-32).

이러한 말씀은 그들이 그를 믿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공허한 헛소리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죽음과 장사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마 27:62-64).

무덤을 돌로 인봉하고 경비병을 세웠을 때, 바리새인들은 사실상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볼 것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독교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을 어떻게 다루는가? 복음을 듣는 자들은 자신들이 들은 것을 신뢰하는가? 그들은 하나님이 참되시다고 인치는가? 그들은 "그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라는 주님의 말씀을 정말로 믿는가(요 3:18)?

아, 불신자여! 당신은 바로 지금 거룩하신 하나님의 정죄가 지금 당신 위에 임하여 있다. 이것은 얼마나 두려운 사실인가!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방주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로 피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정죄를 당하셨다. 성육신한 진리인 그는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라고 선언하셨다(요 3:36).

아, 구원받지 못한 가련한 친구여! 만일 당신이 거짓말할 수 없는 자의 이러한 말씀들을 정말로 믿었다면, 틀림없이 당신은 나중으로 미루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감히 더 이상 꾸물거릴 수 없 없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당신 자신을 그의 발 앞에 던지라. 가련한 죄인으로서 믿음으로 그를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라. 하나님의 아들의 이러한 말씀들을 허튼소리로 여기지 말라. 도리어 그것을 믿고 영혼의 구원을 받으라. 💕

Arthur W. Pink 창세가 강해 p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