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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40] 야곱의 예언 1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140] 야곱의 예언 1

En Hakkore 2024. 3. 22. 10:52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창 49:13).

아들들을 축복하는 가운데, 여기에서 야곱은 넷째 아들로부터 곧바로 열째 아들로 넘어간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에 불완전한 것은 없다. 성경의 모든 부분이 완전하다. 성경의 모든 단어들이 신적으로 영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어들의 배열과 배치까지도 그것이 성령의 역사(役事)임을 증명한다. 💕

하나님은 질서(order)의 하나님이시다.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의 모든 말씀 속에서 그것(order)을 발견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야곱은 넷째 아들 유다를 축복할 때 육체를 따라 그 지파로부터 오게 될 그리스도 자신을 내다보았다.

한편 우리 주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스불론 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유다와 스불론이 나란히 놓이게 된 것이다. 우리 주님이 태어난 지파가 언급된 후, 곧바로 그가 30년 동안 사셨던 지파가 언급된다. 나는 바로 이것이 여기에서 야곱이 넷째 아들로부터 곧바로 열째 아들로 넘어간 주된 이유라고 믿는다.

이스라엘 역사(歷史) 가운데 스불론 지파가  맡은 역할은 그다지 두드러진 것이 아니었다. 스불론 지파는 비록 매우 드물게 언급되기는 하지만 언급될 때마다 매우 명예로운 일과 관련하여 언급된다.

첫째로, 우리는 사사기 5장에서 그들에 대해 읽는다. 거기에서 드보라는 야빈과 시스라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를 송축하면서, 각각의 지파들이 맡은 역할을 노래로써 표현한다. 그때 그녀는 스불론과 납달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18절). 또 역대상 12장에서 우리는 "다윗에게로 나아와서 사울의 나라를 그에게 돌리고자" 했던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23절), 거기에 스불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스불론 중에서 모든 무기를 가지고 전열을 갖추고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능히 진영에 나아가서 싸움을 잘하는 자가 오만 명이요"(33절). 또 같은 장 40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보게 된다.

"또 그들의 근처에 있는 자로부터 잇사갈과 스불론과 납달리까지도 나귀와 낙타와 노새와 소에다 음식을 많이 실어왔으니 곧 밀가루 과자와 무화과 과자와 건포도와 포도주와 기름이요 소와 양도 많이 가져왔으니 이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기쁨이 있음이었더라."

스불론에 대한 야곱의 예언은 장차 그 지파가 가나안 땅에서 차지하게 될 기업의 위치에 초점이 모아진다. 신명기 33장에 열두 지파에 대한 모세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 스불론에 대한 예언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예언과 매우 비슷하다.

"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즉 바다로 나갔음)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그 산에(즉 시온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신 33"18, 19).

여기에서 야곱이 묘사하는 스불론의 성격은 유다의 성격과 매우 다르다. 스불론 지파는 공간적으로 다른 지파들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들은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가는 사자"와 같은 유다 지파와도 다르고(9절)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나귀"와 같은 잇사갈과도 다르다(14절).

스불론은 바다를 무대로 상업을 하는 지파가 될 것이었다. 야곱은 스불론에 대해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 이를 것이라고 예언한다. 시돈은 베니게(Phoenica)에 속한 도시인데, 그러한 예언은 그들이 베니게인들의 교역에 참여할 것을 함축한다.

(납달리 지파와 함께) 스불론 지파에게 할당된 땅은 신약에서 "이방의 갈릴리"(Galilee of the Gentiles)로 알려진 지역이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마 4:15). 이 지역의 갈릴리인들은 이방인들과 자유롭게 교류했던 활기가 넘치며 진취적인 사람들이었다.

스불론에 대한 모세의 예언은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 준다(신 33:18-19을 보라). 그리고 그것은 갈릴리인들이 십자가를 전파한 최초의 복음전도자들이 된 신약시대를 내다본다. 모세가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고 말한 것을 주목하라(신 33:18).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 가운데 열한 명이 갈릴리인이었던 것은 정말로 놀랍지 않은가? 오직 유다 한 사람만 예외였다. 이어지는 모세의 예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9절).

스불론에 대한 야곱의 예언 가운데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이 지파와 관련하여 야곱은 "그는 배들의 피난처가 될 것이라" 라고 말했다(He shall be for a haven of ship, 한글개역개정판에는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라고 되어 있음).

갈릴리는 폭풍에 시달린 배들이 닻을 내리고 안식할 수 있는 피난처를 제공해 줄 것이었다. 요셉과 마리아가 어린 그리스도와 함께 애굽으로부터 돌아온 후 "피난처"를 발견한 장소는 바로 이곳이었다. 또 요한복음 7:1에서 우리는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러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라는 말씀을 읽는다. 여전히 갈릴리는 그에게 "피난처" 였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창 49:14, 15).

이러한 말씀에 대해 나는 아주 적은 빛밖에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여기에서 다섯째 아들 잇사갈에 대한 예언을 구성하는 각각의 표현들의 정확한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각각의 표현들이 실제로 잇사갈 지파의 행적 속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추적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오늘날 어떤 사람(혹은 지파)을 나귀와 비교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다. 그 안에는 그에 대한 힐난(詰難)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야곱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은 나귀를 경멸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도리어 나귀는 영예로운 동물이었다.

나귀는 짐을 나르는 유용한 동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것이기도 했다(삿 10:4; 12:14을 보라). 솔로몬의 시대까지, 이스라엘에는 말이 없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르는 것을 금하셨기 때문이다(신 17:16을 보라).

그렇기 때문에 당시 통상적으로 시용된 유용한 돌물은 나귀였다. 마치 오늘날의 말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나귀"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특별하게 구별된 백성임을 일깨워 주는 한 가지 도구였다. 그들은 고대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말과 병거가 아니라 여호와를 의지(依支)했다.

야곱은 잇사갈을 "건장한 나귀" 라고 표현했다. 야곱의 이러한 예언은 이후 잇사갈 지파의 역사(歷史) 속에서 분명하게 성취되었다. 광야에서 행한 두 번째 인구 조사가 민수기 26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우리는 오직 유다와 단만이 잇사갈보다 수적으로 더 강성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단은 잇사갈보다 고작 100명 더 많았을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왕정 시대에 잇사갈 지파는 한층 더 강성해졌다. 광야 시대에는 잇사갈 지파 가운데 전쟁에 나갈 만한 남자들의 숫자가 64,300명이었던 반면(민 26:25), 왕정 시대에는 87,000명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형제 잇사갈의 모든 종족은 다 용감한 장사라 그 전체를 계수하면 팔만 칠천 명이었더라"(대상 7:5).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