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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36] 야곱의 말년의 생애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136] 야곱의 말년의 생애

En Hakkore 2024. 3. 22. 10:50

히브리서 11:21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는 말씀을 읽는다. 여기에서 성령께서 야곱의 생애에 있어서의 연약한 부분들은 그냥 지나치면서 그의 말년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곧바로 직행하는 것을 주목하라.

여기에서 야곱의 믿음으로서 그의 두 가지 행동이 선택된다. 전자는 창세기 48장에 기록된 행동이며, 후자는 창세기 47:31에 기록된 행동이다. 지금 나는 히브리서 기자가 창세기에 나타나는 순서를 바꾼 이유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자 한다. 다만 그가 제시하는 두 가지 믿음의 행동만을 창세기에 나타나는 순서대로 간단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 그가 그 아들 요셉을 불러 그애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라 요셉이 가로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곱이 또 가로되 맹세하라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니라"(창 47:29-31).

여기에서 야곱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과 관련한 정황을 주목해 보라. 그것은 너무도 아름답지 않은가! 여기에는 언뜻 볼 때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은 단순히 죽음을 앞둔 한 노인의 감상적인 마음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은 야곱과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지금 야곱은 그 약속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아직 야곱은 그 땅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이방 땅에서 곧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땅에 떨어질 수 없음을 알며, 그의 믿음은 부활을 내다본다. 마침내 그의 오랜 불신앙은 힘을 잃었으며, 믿음이 승리했다.♡

그는 요셉에게 자신의 시신을 애굽에 묻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의 시신은 애굽에서 옮겨 그의 조상들의 매장지에 묻혀야만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의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했다." 여기에서 그의 믿음 즉 "하나님이 당신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행하시고 당신이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실 것" 이라는 믿음이 온전히 나타났다.

히브리서 11장이 제시하는 야곱의 두 번째 믿음의 행동은 창세기 48장에 기록된 행동이다. 창세기 48장 전체에 걸쳐 우리는 야곱의 생각 속에 하나님이 얼마나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 그리고 그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강력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잘 볼 수 있다.

그는 요셉에게 하나님이 루스에서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가나안 땅을 자신과 자신의 후손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신 것을 이야기한다(48:3). 그는 하나님을 "지금까지 자신을 가르친" 자로서, 그리고 "자신을 모든 환난에서 건진" 자로서 말한다(15, 16절). 이것은 "그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그를 따랐음을" 기꺼이 인정하는 것이었다(시 23:6).

야곱은 머지않아 죽을 것이었다. 이제 그는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기를 원한다. 요셉은 이 일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별히 그의 장자 므낫세가 축복을 받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그는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편에, 그리고 에브라임을 왼편에 위치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야곱의 오른손이 므낫세의 머리 위에, 그리고 그의 왼손이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놓이도록 했다. 그러나 야곱의 자연적인 시력(視力)이 어두웠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적인 분별력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손을 "엇바꾸어" 얹었다(14절).

성경은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다고 분명하게 언급한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그렇게 행동한 것은 옛 사람 "야곱"이 아니라, 새 사람 "이스라엘" 이었다. 이와 같이 그는 "믿음으로"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했다.

분명 그것은 보는 것이나 혹은 이성(理性)으로 행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의 총리의 두 아들이 자신들이 태어난 애굽을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이주할 것이라는 것은 얼마나 있음직하지 않은 일인가! 또 두 아이가 각각 한 지파식을 이룰 것이라는 것 역시 얼마나 있음직하지 않은 일인가! 또 아우가 형보다 더 큰 자가 될 것이라는 것 역시 얼마나 있음직하지 않은 일인가!

또 여기의 노인 야곱에게 있어 훗날 에브라임이 남쪽의 "유다 왕국"과 구별되는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을 대표하는 지파가 될 것을 예견하는 것은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 그런나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영감(靈感)을 받았으며, 그것이 확실하게 성취될 것을 믿었다. 여기에 나타난 그의 믿음을 보라!

그것은 얼마나 멋진 믿음인가! 그의 자연적인 시력은 흐릿했을지 모르지만, 믿음의 시력은 날카로웠다. 그리고 의의 육체의 약함 가운데 믿음의 강함이 온전케 되었다. 💕

계속해서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고 난 후 요셉에게로 돌이켜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라고 말한다(21절). 이것 역시 얼마나 있음직하지 않은 일로 보이는가!

요셉은 지금 애굽에 완전하게 정착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매우 영화로운 신분으로 말이다. 그러나 야곱은 더 이상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그의 후손이 가나안 땅을 소유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으면서, 확신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말하고 있었다.

창세기 49장에 묘사된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의 마지막 절정을 보여 준다. 모든 자손들이 임종을 앞둔 야곱의 침상 주위에 모였으며, 야곱은 각 사람들에게 축복한다. 어린 시절과 중년 시절에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의 모든 관심은 다른 사람들에게로 모아진다. 과거에 그는 주로 현재의 것들에 모든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미래와 관련된 것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49:1).

여기에서 특별히 18절을 주목하라.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과거에 "기다리는" 것은 그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약속된 장자권을 하나님이 주실 때따지 기다리는 대신, 그는 스스로 그것을 얻고자 했다. 라반으로부터 품삯을 받는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가장 어려운 교훈을 배웠다.

그는 은혜로 말미암아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야곱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자는 결국 그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마침내 은혜가 승리한 것이다. 부디 하나님이 나와 여러분들로 하여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능히 달려갈 수 있도록 더 큰 은혜를 베푸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히 12:1). 💕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