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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19] 야곱이 하란을 떠남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119] 야곱이 하란을 떠남

En Hakkore 2024. 3. 20. 12:00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31:3)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보낸 20년 동안 그와 하나님 사이의 만남을 암시하는 어떤 말씀도 우리는 발견하지 못한다. 거기에서 그가 제단을 쌓았다든지, 혹은 기도했다든지, 혹은 스스로를 철저한 세속주의자들로부터 구별시켰다는 등의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제단"은 단순히 희생제사와 관련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교제와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제단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하나님과 구속받은 죄인이 만나 교제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제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의 교제 밖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신실하심 가운데 우리와 함께 게시지만,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는다"(J. N. D.). 그러나 비록 야곱이 하나님을 잊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잊지 않으셨다. 💕 여기를 보라. 야곱에게 절실한 필요가 생기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그에게 떠날 것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으로부터 밧단아람을 떠나라는 말씀을 받고, 야곱은 자기 아내들을 들로 불렀다. "야곱이 사람을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가 있는 들로 불러다가"(4절). 그곳은 그가 그녀들과 더불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야곱이 아내들에게 떠날 것을 이야기한 이유는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부분적으로 라반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5절). 이와 관련하여 풀러의 글을 인용해 보도록 하자.

"대부분의 경우 안색은 그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확실한 표지이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거짓과 속임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말보다 그의 안색이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찌무룩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는 것은 종종 불평을 늘어놓는 것보다 더 견디기 어렵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나마 서로 대화하여 문제를 풀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은 라반의 찌무룩한 안색에도 불구하고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라고 말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찌푸린 얼굴 때문에 근심하는 우리에게 임하는 최고의 위로는 바로 하나님의 웃음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웃음 가운데 행한다면, 우리는 사람들의 찌푸린 얼굴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야곱은 밧단아람을 떠나는 문제에 대해 아내들에게 말하고 그녀들로부터 동의를 얻었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일은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야곱은 자신이 떠나는 것을 외삼촌이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어떠면 자신을 강제로 붙잡아 둘는지도 모르며, 최소한 자신의 소유의 상당 부분을 빼앗길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야곱은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그는 외삼촌이 양털을 깎으러 갈 때까지 기다린 후 그 기회를 이용한다. 마침내 야곱은 애들과 자녀들과 모든 소유를 이끌고 "그 거취를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다(20절).

이렇게 가만히 떠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여기의 그의 모습은 다음의 말씀이 묘사하는 모습과 얼마나 다른가!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사 52:12).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19절에 의해 한층 더 분명해진다.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여기에서 드라빔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도록 하자.

많은 학자들은 "드라빔" 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묻다"를 의미하는 수리아어 어원에서 찾는다. 이것은 왜 라헬이 야곱과 함께 밧단아람을 떠날 때 이러한 "가족 신"(family gods)을 가지고 떠났는지 그 이류를 설명해 준다. 이제 성경에서 드라빔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성경에서 "드라빔"이 나타나는 다음 구절은 그것이 신탁(神託)을 묻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사사기 17:5에서 우리는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라는 말씀을 읽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이어진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6절). "미가가 그 레위인을 거룩하게 구별하매 그 청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있었더라"(12절). 그리고 다음 장에서 우리는 단 지파가 자신들의 거할 기업을 찾는 가운데 그 땅으로 정탐꾼들을 보내는 이야기를 읽는다.

그들은 드라빔이 있는 미가의 집으로 와서 그의 제사장에게 말한다.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삿 18:5). 정탐군들은 미가의 제사장이 하나님에게가 아니라 "드라빔"에게 묻기를 바랐다. 그러한 사실은 이 사건의 결말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정탐꾼들은 임무를 마치고 자신들의 지파로 돌아갈 때 미가의 제사장을 데리고 가기를 원했으며 그는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가지고 가서 그들의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이다(삿 18:8-20을 보라).

다음으로 우리가 "드라빔"에 대해 듣게 되는 것은 사무엘상 19:13이다. "미갈이 드라빔을 가져다가 침상에 누이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로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한글개역개정판에는 "미갈이 우상을 가져다가"로 되어 있음).

여기의 말씀은 사울의 딸이 우상 숭배자였다는 슬픈 사실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드라빔"이 사람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음도 암시한다 - 미갈이 드라빔을 가져다가 침상에 누인 것은 마치 자기 남편이 잠자고 있는 것처럼 꾸미기 위함이었음을 주목하라.

에스겔 21:21 역시 "드라빔"이 신탁을 묻기 위한 용도로 사용된 것을 보여 준다.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어귀에 서서 드라빔에게 묻되 화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제물의 간을 살펴서"(한글개역개정판에는 "점을 치되"로 되어 있음).

계속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나중에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멀리 하는 가운데 점점 더 깊이 "드라빔"에 빠졌음을 보여 준다.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가 헛되므로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슥 10:2).

오늘날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경우를 얼마나 자주 보는가? 예전에 이스라엘이 여호와로부터 돌이켜 이교도들의 "드라빔"에게로 갔던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 세계의 배교와 함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참된 신탁의 성경에서 돌이켜 유혹하는 영들과 사탄의 속임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가?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