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창세기 강해 105] 두 아들을 축복하는 이삭(창세기 27장)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105] 두 아들을 축복하는 이삭(창세기 27장)

En Hakkore 2024. 3. 20. 11:51

본장에서는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그의 두 아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들은 창세기 25:20-26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애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이러한 말씀에 대한 해설은 다음에 야곱에 대해 다룰 때를 위해 유보해 두기로 하자. 그리고 오늘은 곧바로 에서가 자신의 장자권을 파는 유명한 사건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25:27-34).

이러한 말씀이 기저(基底)에는 표면에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에서와 야곱은 각각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대표한다. 에서는 불신자를 대표하며, 야곱은 신자를 대표한다. 우리는 여기의 간략한 표현들 속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 이었다(27절). "사냥꾼"은 고요하며 차분한 개념보다 끊임없이 이동하며 떠돌아다니는 개념을 전달한다. 성구사전을 찾아보라. 그러면 여러분은 "사냥꾼" 이라는 단어가 대부분의 경우 악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삼상 24:11; 욥 10:16; 시 140:11; 잠 6:26; 미 7:2; 겔; 13:18 등을 참조하라).

성경에서 "사냥꾼"으로 특별하게 명명되는 사람은 오직 두 사람뿐이다. 한 사람은 니므롯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여기의 에서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이와 같이 에서가 바벨탑을 쌓은 니므롯과 함께 연결되는 사실은 그가 어떤 성격의 사람이었는지를 그대로 보여 준다.

다음으로 우리는 에서가 "들사람"(man of the field)이었음을 듣는다(27절). 마태복음 13:38의 "밭(field)은 세상이요" 라는 말씀의 빛에 비추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에서 안에 담겨 있는 영적 사실을 분별할 수 있다. 그는 상징적으로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야곱도 에서처럼 두 가지로 묘사된다. 야곱은 "조용한 사람" 으로서 "장막에 거주했다"(27절). 여기에서 "조용한"(plain)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다른 곳에서 "온전한" "정직한" "더럽혀지지 않은" 등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또 "장막에 거주한" 것은 그가 그 땅에서 외인과 나그네로서 장차 올 도성을 바라보았음을 암시한다.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29절).

여기에서 또 다시 날카롭게 나타나는 이삭의 두 아들 사이의 대조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야곱은 집안일에 열중이었다. 그는 음식을 만들면서 자신의 분깃을 향유했다. 반면 에서는 또 다시 "들"과 연결된다. 그는 "들에서 돌아와 심히 피곤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에서는 세상에 속한 사람을 대표한다.

그런 차원에서 여기에 묘사된 그림은 매우 시사적(示唆的)이다. 에서는 아무런 짐승도 잡지 못한 채 들로부터 돌아왔다. 그는 배가 고프고 심히 피곤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항상 이와 같다. "들"에는 사람을 참으로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인간의 영적 필요에 진정으로 부응하는 것을 전혀 주지 못한다. 인간은 짐승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주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라고 말씀하신다(요 4:!3).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악한 자 안에 놓인" 세상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항상 하나님을 향해 헐떡거리는 인간의 참된 필요를 진정으로 채워줄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에서가 경험한 것은 후대에 솔로몬이 경험한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해 아래서" 만족을 찾는 것은 헛되고 헛된 일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야곱들"만이 - 즉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들만이 - 속사람의 굶주림을 진정으로 달래주는 것을 소유한다.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흠정역(KJV)의 번역자들이 여기에다가 "죽"(pottage)이라는 단어를 이탤릭체로 끼워놓음으로써 의미를 모호하게 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흠정역에는 "red pottage" 라고 되어 있음).

많은 경우 이탤릭체로 된 단어는 더 나은 의미를 전달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그것의 참된 의미를 가린다. 여기의 경우도 그렇다. 29절에서 성령에 의해 "죽"이라는 단어가 채택된 것은 야곱이 향유한 분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 30절에서 에서가 실제로 말한 것은 "내가 피곤하니 나로 하여금 그 붉은 것을 먹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가 말한 것의 전부였다. 그는 심지어 야곱이 만든 것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그는 사냥에 대해서는 완전히 익숙했지만,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의 분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