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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04] 이삭의 생애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104] 이삭의 생애

En Hakkore 2024. 3. 20. 11:49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26:23).

여기에서 이삭이 본래의 교제의 장소로 돌아온 것을 상징하는 지리학적인 언급을 주목하라.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을 주목해 보라.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24절). 이삭이 브엘세바로 돌아온 바로 그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26:25).

여기에서 이삭이 "장막"을 치기 전에 먼저 "제단"을 쌓은 것을 주목하라. 그랄에서는 제단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씀을 주목해 보라.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26절).

이삭이 브엘세바로 돌아온 결과는 단지 개인적인 축복만이 아니었다. 겸하여 아비멜렉이 그를 찾아왔다. 그런데 이번에 찾아온 것은 그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었다. 여기의 마지막 우물에서는 "다툼"에 대한 어떤 언급도 나타나지 않는다. 도리어 이번에 찾아온 것은 이삭에게 특별한 부탁을 하기 위함이었다.

아비멜렉과 아훗삿과 비골은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라고 말했다(28절). 이삭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장소로 돌아오자 무슨 일이 벌어졌나?

전에 그의 원수이던 자들이 그를 찾아와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심을 증언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창 26:30, 31).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삭이 온유함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부당한 행동에 대처했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온유함에 수반되는 또 하나의 은혜를 나타내는데 실패했다. 본성으로 말미암은 온유함은 많은 경우 나약함으로 변질된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는 온유함은 의의 요구를 제쳐놓지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의 요구를 굳게 붙잡는다.

여기에서 이삭은 실패했다. 용서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그와 그와 함께 반드시 의(義)가 따라야만 한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책망(rebuke)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 한글개역개정판에는 "경고하고"로 되어 있음).

분명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잘못된 일을 행했다. 그러나 이삭은 정당하게 책망하는 대신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물론 이것은 친절한 행동이기는 했지만, 의의 요구에 부합되는 행동은 아니었다. 이것을 여기와 비슷한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한 행동과 비교해 보라.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을 책망하매"(창 21:25).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닛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창 26:34, 35).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엄중한 경고를 발한다. 결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불신자와 연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존귀를 가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스스로 재앙을 자초하는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명확했다.

그들은 어떤 상황아래서도 가나안 사람들과 혼인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 4).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창세기 전체에 걸쳐 하나님의 마음은 분명하게 나타났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친족 가운데 이삭의 아내를 예비하려고 했을 때에도 그것은 분명하게 나타났다(창 24장).

그때 아브라함은 이삭이 가나안의 딸과 혼인하는 것을 엄히 금했다. 그러나 이삭은 이 문제에 대해 아브라함만큼 단호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아들이 가나안 여자와 혼인하는 것을 막는데 실패했다. 결국에서는 헷 족속의 딸과 혼인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라고 말씀하셨다(창 18:19). 그러나 이삭에게는 그렇게 말씀하실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삭의 의로운 영혼 속에는 큰 슬픔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라는 말씀 가운데 잘 나타난다.

창세기 27장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다음 장을 위해 유보하도록 하자. 여기에서는 다만 독자들이 잘 아는 사건을 간단히 제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140세가 되었을 때, 이삭은 자신이 갑자기 죽게 될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그는 족장으로서의 제사장직인 위치에서 자기 아들들에게 축복하는 마지막 영적 행동을 준비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에 있어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대신 사냥해서 잡은 고기로 만든 별미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명백한 뜻을 뒤집으면서 하나님이 야곱을 위해 예비하신 것을 에서에게 주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법이다. 이삭이 육체를 따라 행동하자, 리브가와 야곱도 같은 방법으로 행동한다.

여기에서 이삭의 역사(歷史)는 끝난다. 야곱에게 가나안의 딸들로부터 아내를 취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난 후, 그는 무대에서 사라진다(28:1). 그리고 그때부터 그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죽음과 장사만 제외하고 말이다(25:27, 29).

벨렛(J. G. Bellett)이 "족장들"(The Partriarchs)이라는 책에서 말한 것처럼, 이삭의 말년은 마치 더 이상 주인이 쓰기에 적합하지 않은 녹슨 그릇처럼 되었다. 그의 말을 좀 더 길게 인용해 보자.

"이삭은 귀퉁이가 깨어진 그릇처럼 되었는가? 그는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지 않은 그릇처럼 치워졌는가? 그는 더 이상 쓰임을 받기에 적합한 그릇이 아니었나? 그의 역사(歷史)는 그렇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것을 끝까지 지켰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행로를 살피는 가운데 이미 그것을 보았다.

아브라함의 잎은 시들지 않았다. 그는 노년에 열매를 맺었다. 그것은 모세도 마찬가지였고, 다윗도 마찬가지였고,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갑옷을 입은 채 죽었다. 그들은 밭에서 쟁기질을 하면서 죽었다. 물론 그들 역시도 일하는 가운데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쓸모없는 그릇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모세는 요단강에 있는 진(陣)에서 백성들을 지키고 있으며, 다윗은 나라의 안위를 보살피고 있으며, 바울은 전신갑주를 입고 있다. 그들은 주인이 돌아왔을 때 자기 자리에서 일하고 있었던 종들과 같았다.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눅 12:43). 그러나 이삭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마지막 40년 동안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그는 이를테면 계속해서 녹이 슬어가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두려운 경고가 되는가! 더 이상 쓰임 받기에 적합하지 못해 치워지는 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다. 스스로를 더럽히면서 그냥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다양한 실례들을 발견한다.

애굽에서의 야곱의 말년을 생각해 보자. 그는 거기에서 치워진 그릇과 같지 않았다. 도리어 거기에서 그는 스스로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그가 애굽에서 보낸 17년 동안 정말로 보화와 같은 일들이 있었다. 우리는 야곱이 애굽에서 보낸 그의 말년의 생애로부터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반면 솔로몬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는 훨씬 더 나쁜 경우이다. 그의 말년의 생애는 스스로를 더럽히는 생애였다. 그는 이삭이나 야곱과 많이 달랐다. 이삭은 도덕적인 측면에서 마지막까지 별다른 흠이 없었다. 또 야곱의 말년은 그의 생애 가운데 최선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말년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솔로몬이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왕상 11:4)."

"이삭과 야곱과 솔로몬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일깨워 준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집에 있는 다양한 그릇들을 보여 준다. 어떤 그릇은 끝까지 쓰기에 적합했으며, 어떤 그릇은 녹이 슬었으며, 어떤 그릇은 더러워져 흉하게 되었다"(J. G. Bellet, "The Patriaarchs.") 💕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