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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56] 붉은 줄(여호수아 2:1-24) 본문

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56] 붉은 줄(여호수아 2:1-24)

En Hakkore 2024. 2. 13. 12:35

4. 붉은 줄

라합은 그 두 정탐꾼에게 그녀와 엄숙히 언약을 맺어 다가오는 여리고의 멸망에서 그녀의 가족을 보존해 주기를 보증해 달라고 요청했는데(수 2:12-13), 이로 인하여 그 정탐꾼들은 매우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현대인들이 올바로 해결하지 못하는 한 가지 예리한 문제를 제기한다. 바로 얼마 전에 이스라엘은 가나안 민족들을 대하는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은 바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신 7:2).

그런 분명한 금지 명령에 비추어 볼 때에, 과연 그 정탐꾼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옳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바른 답변은 하나님의 명령들에 대한 구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적절히 적용시키는 데에 있다.

이는 시대마다 교육을 받은 학자들이 제기해온 것으로, 도덕법(moral laws)과 실정법(positive laws)을 구별하는 것인데, 곧 본질적인 공의에 기초하는 법과 주권에 기초하는 법을 서로 구별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도덕성에 준하여 우리는 부모가 자녀를 아끼고 보호해야 하며 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런 도덕성이 그리스도인에게 세례나 성찬을 시행하도록 가르침을 주지는 않는다. 이 경우는 실증적인 제도에 속하니 말이다.

하나님의 실정법을 통해 베풀어지는 명령들은 전적으로 그분의 주권적인 뜻에 달려 있으며, 그 이외에는 다른 요인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적적인 계명들을 통해 제시되는 명령들은 그분의 뜻의 권위로써나 그가 창조세계 속에서 이루어 놓으신 사물의 본질과 질서로써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실정법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고유한 대권(大權)으로 지정되는 것이나, 도덕법은 항구적인 것으로서 그것에 따라 선과 악이 필연적으로 구별된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의식법은 전자에 속했다. 그러나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십계명의 요체-는 명령은 후자에 속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신적 계시에 의하여 그것을 받는 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것이요, 후자는 도덕적인 책임을 지니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실정법에 순종하는 것이 도덕법의 원칙들을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 될 때에는 언제나 하급법은 상급법에 따라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타락한 성향에 반대되는 많은 것들을 믿고 행하도록 요구하시지만, 그가 우리에게 주신 도덕성에 반대되는 것을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는 일은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시장한 처지에서 그가 진설병 다섯 덩이를 요구한 사례(삼상 21장)에서 이러한 구별에 대한 실례를 잘 볼 수 있다. 제사장 아비멜렉은 그 떡덩이들이 일상적인 용도가 아니고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된 것"들임을 지적하였으나, 그 사람들이 더럽힘이 제거된 처지임을 알고서 그 떡덩이들을 다윗에게 주어 먹게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주님께서도, 거룩한 떡덩이를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그것을 먹은 그들이 죄가 없었다고 말씀하셨다(마 12:3-6).

이처럼 제사장이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거룩한 떡을 주지 못하도록 금지하도록 규정된 설정법이 상황의 절실함에 양보하게 된 것이다.

"다윗의 자손께서는 그 일을 승인하심으로써, 제사보다 자비가 우선이며, 의식 준수보다 도덕적인 의무가 우선하며, 또한 달리 도무지 방법이 없고 시급한 섭리적인 필요성이 있는 경우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헨리 Henry).

그러므로 신명기 7:2에 제시되어 있는 법은 실정법으로서 모든 사안에 다 절대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의 그 자체가 우리가 언제나 핍절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절대로 선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라합은 그 두 정탐꾼들에게 자비를 보였고, 스스로 위험을 무릅썼었다. 인간의 본능은 자비를 베푼 자들을 향해서 자비로운 감정을 갖기 마련이다.

감사의 마음은 자연의 법칙인데, 자연의 법칙이 실정적인 강령보다 우선한다. 그러므로 경건한 그 두 정탐꾼은 신명기 7:2이 그들의 안전을 확보해 주었던 그녀에 대해 정의롭고도 자비롭게 처신하지 못하게 가로막지는 않는다는 것을 지각할 만큼 충분한 도덕적 감수성과 영적 분별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해야 할 임무는 분명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성급하고도 경솔하게 그 임무를 이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 어떠한 조치나 약속도 별 생각 없이 순간적인 충동으로 해서는 안 된는 것이었다.

우리는 스스로 책임을 질 일을 면밀히 따져보기까지는 명확한 약속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말이 우리를 얽어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러니 그 어떠한 엄숙한 약속을 하더라도 우리는 그 전에 미리 기도하면서 모든 관련되는 사안을 철저하게 숙고하여야만 한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