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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89] 그랄에서의 아브라함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89] 그랄에서의 아브라함

En Hakkore 2024. 3. 18. 11:04

"이스라엘 자녀들의 마음이 어떠한지가 드러나기 위해 광야의 40년 방랑이 필요했다(신 8:2).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연단의 긴 과정의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은 그들이 자신의 약함과 아무것도 아님을 더 깊이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스스로의 연약함을 더 깊이 의식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따라야 할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우리는 그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며, 그의 속죄의 피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아직 어린아이의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마음을 충분하게 아는 것을 그는 아직 감당할 수 없다. 충분하게 알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는 거기에 압도되어 절망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출 13:17).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우회로 인도하신다. 우리의 나아가는 발걸음이 우리가 스스로를 아는 지식과 보조를 맞추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C. H. M) 💕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마음의 상태를 드러낸 것은 - 우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 환경의 압력이었다. 오래 전에 한 설교자는 "우리의 믿음의 분량은 곧 우리가 곤경의 때에 갖는 믿음의 분량이다" 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낙망과 상실과 핍박의 때는 시험의 때이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자주 넘어지고 마는가! 이 부분에서 우리 주님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환경의 압력은 단지 그의 마음의 완전함을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데 기여할 뿐이었다. 굶주림 가운데 사탄으로부터 자신의 필요를 위해 떡을 만들라는 유혹을 받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사셨다.

행로에 지쳐 우물가에 앉으셨을 때, 그는 가련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은혜와 생명의 말씀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하지 않았다. 그가 이적을 행한 성읍들이 그의 메시지를 배척했을 때, 그는 온유함으로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말하며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다(마 11:23-26).

그는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의 완전함은 십자가 위에서의 최고의 위기의 때에 충분하게 드러났다. 그때 그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으며, 회개하는 강도에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가련한 어머니를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겼으며,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셨다.

우리의 옷은 - 옷은 행동과 성품과 삶의 방식을 상징한다 - 기껏해야 수많은 헝겊쪼가리들을 이어 붙힌 누더기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옷이었다(요 19:23). 그렇다. 그는 모든 면에서 특별하며 탁월했다.

13절이 여기의 아브라함의 행동에 대해 빛을 던져 준다.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아내에게 자신을  자신을 오라비라고 부르라는 아브라함의 요구는 그들이 갈대아를 떠나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러므로 그것은 그들이 태어난 곳으로부터 가져온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무의식중에 옛 사람에 들어붙어 있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육체의 악함과 옛 본성의 전적 부패와 옛 사람의 추악함을 배워야만 한다. 진실로 우리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일" 필요가 있다.

사라에 대한 아브라함의 그 같은 요구는 명백히 자신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그의 믿음의 연약함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바리새적인 태도로 아브라함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단지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을 실증(實證)하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과 행함의 불일치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영혼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두려워하는가! 영원한 것들과 관련해서는 확실한 믿음을 갖는 자들이 얼마나 자주 일시적인 것들과 관련해서는 불신앙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가!

우리는 주님을 믿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의로 여겨졌다. 그러나 여기의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일상의 실제적인 삶의 문제들 가운데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우리 자신의 지혜와 재주를 더 많이 신뢰하는가!

이런 아브라함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행동하셨는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대해 더 이상 참지 않고 그를 내던져 버리셨는가? 분명 아브라함은 이방인들 앞에서 악한 모범을 보임으로써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보라.

그를 내던져 버리는 대신, 하나님은 특별하게 개입하셔서 그와 그의 아내를 위기로부터 건져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버리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를 원수들의 손에 내버려두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마땅히 받을 자격과 무관하게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의 공로와 무관하게 값없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떤 연약함도 그것을 무효로 만들지 못한다. 💕

"예수를 의지(依支)하는 영혼을
나는 결코 원수들의 손에 버려주지 않을 것이라.
지옥이 삼키려고 애쓸지라도,
나는 결코,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라."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