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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87] 99세 때의 아브라함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87] 99세 때의 아브라함

En Hakkore 2024. 3. 18. 11:03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걸어 완전하라"(walk before Me, 한글개역개정판에는 "내 앞에서 행하여" 라고 되어 있음).

우리는 서로 다른 전치사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의 다양한 "걸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네 구절을 주목하고자 한다. 여기 창세기 17:1에서 아브람은 전능한 하나님 "앞에서(before) 걸으라고 명령받는다.

또 신명기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여호와를 "따라"(after) 걸으라고 훈계한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라 걸으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신 13:4). 그런가 하면 창세기는 에녹과 노아에 대해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with) 걸었다고 증언한다(창 5:24, 6:9).

한편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게 신약은 그리스도 "안에서"(in) 걸으라고 훈계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걷되"(골 2:6). "앞에서" 걷는 것은 아버지 앞에서 뛰어가는 아이를 암시한다. 아버지가 뒤에 있으므로 자신의 완전한 안전을 의식하면서 말이다. "따라" 걷는 것은 뒤에서 주인을 따라 걸어가는 종의 모습과 잘 부합된다.

"함께" 걷는 것은 교제와 친교를 암시한다. 그리고 "안에서" 걷는 것은 연합을 암시한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걷는지에 대해, 성령은 다음 절에서 가르쳐 준다. -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골 2:7).

네 가지 서로 다른 전치사로 구성되는 신자의 걸음의 다양한 측면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앞에서 걸으며, 종으로서 그를 따라 걸으며, 친구로서 그와 함께 걸으며, 그의 몸의 지체로서 그 안에서 걷는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주의 깊은 이라면 여기의 "완전"을 대체하는 단어로서 난외(欄外)에 "정직"과 "성실"이 보충되어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히브리어 "타민"은 마땅히 "완전"으로 번역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단어가 시편 19:7에 나타난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또 그 단어는 "흠 없는"(without blemish)으로 44회 번역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정말로 아브람에게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나? 그렇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다.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이 그 이하로 말씀하실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완전하신 하나님이 자기 피조물 앞에 완전함 보다 낮은 표준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자신들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예리함을 두루뭉술하게 만들고 했다. 하나님은 성경 전체에 걸쳐 우리 앞에 완전함의 표준을 제시하신다.

율법은 이스라엘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역시도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48). 💕

나아가 신약의 모든 서신들의 가르침은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라는 말씀으로 요약된다(벧전 2:21). 바로 이것이 완전함의 표준이 아닌가?

형제들이여, 바로 이것이 우리 앞에  놓인 표준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계속해서 추구하며 분투해야 할 표준이다.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러나 육체 안에 있는 자는 어느 누구도 이러한 표준을 완전하게 이루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바울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전에 아브람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완전하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불가능한 표준이야!" 라고 중얼거린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자가 "엘 샤다이" 였음을 기억하라.♡

전능자가 우리 하나님인데 누가 감히 "불가능"에 대해 말한단 말인가? 그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우리 앞에 도달할 수 없는 표준을 놓았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우리는 그의 전능한 품 안에서 안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스스로를 비난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족한 은혜를 충분히 전유(專有)하지 못하는 잘못이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고백해야 한다.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17:3).

나는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 엎드린 이러한 행동이 앞장에 기록된 그의 태도 즉 아들을 얻는 일을 하나님에게 맡기는 대신 스스로 그 일을 이루려고 했던 태도의 빛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는 하나님이 행동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육신적인 방법을 의지(依支)했다.

그로 말미암아 13년간의 침묵의 기간이 지났다. 오랜 침묵이 끝나고 이제 하나님은 다시금 아브람에게 스스로를 나타내신다. 그리고 아브람은 그러한 은혜에 압도된다. 그는 자신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호의를 나타내시는 것에 놀라면서 엎드린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17장의 나머지 구절들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다만 두드러진 사실 한 가지만 주목하도록 하자. 여기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전능한 하나님" 으로 계시하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일곱 번에 걸쳐 "I will"을 반복하는 복합적인 약속을 주고 계시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6-8, 19, 21절).

여기에 사용된 "전능하신 하나님" 이라는 신적 호칭은 그러한 약속이 성취될 것에 대한 보증이다. 그의 약속이 확실하게 성취되는 것은 모든 능력이 그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충족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행하실 것이다. 그것이 확실한 것은 여호와께서 5절에서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for a father of many nations have I made thee, 5절).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되게 했느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마찬가지로 바울 역시도 로마서 8:30에서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한다(롬 8:30). 비록 경험적으로 영화롭게 되는 것은 아직 미래에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기의 일곱 번의  "I will"을 출애굽기 6:6-8의 일곱 번의 "I will"과 비교해 보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내가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내가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내가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엑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내가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우리가 이 구절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는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스스로를 "전능한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이후 칠중적인 약속이 따랐던 것처럼 여기의 출애굽기 6장에서도 하나님이 스스로를 여호와로 계시하신(3절) 이후 이와 같이 칠중적인 약속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도 완전하고, 그가 행하시는 방식도 완전하다. 💕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