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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88] 그랄에서의 아브라함(창세기 20장)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88] 그랄에서의 아브라함(창세기 20장)

En Hakkore 2024. 3. 18. 11:03

앞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아브라함에게 "전능자" 로 나타내시면서 그와 함께 아들을 주겠다는 말씀이 포함된 칠중적인 약속을 주신 것을 살펴보았다. 계속해서 18장에서 우리는 당신의 벗과 더불어 풍성한 교제를 나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식탁에서 음식을 드시며, 그에게 소돔과 관련된 당신의 계획을 알리신다. 그리고 같은 장 끝 부분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중보자로서 나타난다.

이제 우리는 창세기 20장에 도달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슬프면서도 극적인 변화를 목격하게 된다.

아브라함은 여기에서 예전에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시용했던 부끄러운 책략을 또 다시 반복한다. 아내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면서 또 다시 아내를 누이처럼 꾸민 것이다. 그러나 사라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해 남편의 죄의 결과로부터 건짐을 받는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창 20:1, 2).

여기의 창세기 20장에서 우리는 성경의 신적 영감(靈感)에 대한 또 하나의 두드러진 증거를 발견한다. 일반적인 작가라면 아브라함 같은 훌륭한 인물의 생애를 기록하는 가운데 이토록 부끄러운 이야기를 포함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영웅 숭배로 기울어지는 법인가. 그리고 전기(傳記) 작가들은 통상적으로 그들이 묘사하는 인물의 경력 가운데 부끄러운 부분이나 결함 같은 것들은 되도록 감추려는 경향이 있다. 여기의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한 전기 작가라면 틀림없이 아브라함 같은 위대한 인물의 생애 가운데 이토록 부끄러운 타락 이야기는 넣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성경은 다른 모든 책들과 다르다. 성령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초상화를 사실 그대로 묘사한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그린다. 언뜻 볼 때 아브라함이 창세기 20장에 기록된 대로 행동했다는 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하면 우리는 바로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닽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잠 27:19).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옛 사람의 본성, 그것이 이따금씩 행동으로 돌출되어 나타나는 사실, 어느 시대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추악한 일에 연루되어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사실, 때때로 믿음과 의의 길로부터 벗어나는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경험 - 이 모든 사실들은 여기의 아브라함의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부끄러운 행동을 설명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이 글을 읽는 어떤 이가 이러한 타락과 넘어짐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의 신실함과 우월한 경건을 자랑하는 대신 모든 영광을 우리를 능히 넘어짐으로부터 지키실 수 있는 자의 비할 데 없는 은혜에 돌려야 한다. 💕

여기의 아브라함의 행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만 있다면 기꺼이 아내의 명예를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아직 경험이 충분치 않은 어린 제자의 타락이 아니었다. 도리어 오랫동안 믿음의 길을 걸었던 자의 부끄러운 타락이었다.

더욱이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이런 사실은 그의 행동을 더욱 나쁜 것으로 만든다. 이와 관련하여 그랜트(F. W. Grant)는 이렇게 말한다.

"아,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 없이 인간에게 도대체 무슨 소망이 있단 말인가! 결코 없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끔찍한 넘어짐 앞에서 우리는 낙망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낙망으로 이끌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우리를 모든 위로와 능력의 근원으로 이끈다. 약함 안에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가 매 순간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여기의 아브라함의 경우가 더욱 나쁜 것은 그것이 즉흥적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옛 죄가 되풀이되는 것이었다. 오래 전에 그는 애굽에서 똑같은 일을 행했다. 거기에서도 그는 여기에서와 같은 이중성을 드러냈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곳에서 불명예스럽게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부끄러운 경험으로부터 아무 유익도 얻지 못했다.

그로부터 20년 내지 25년이 지나갔다. 그는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으며, 그돌라오멜을 쳐부수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으로부터 축복을 받았으며, 모든 재물을 취하라는 소돔 왕의 제안을 멋지게 거절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계시와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가 자신의 얄팍한 계산으로 하나님을 떠나며, 사람을 두려워하는 올무에 빠지며, 가장 수치스러운 거짓말에 의지(依支)하는 것을 본다. 아,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은 명백하다. 여기의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까지, 아브라함은 그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악을 행할 환경 속에 놓여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브라함 안에 잠재해 있었던 악은 그때까지 충분하게 펼쳐지지 않았다. 그러나 위급한 순간이 되자 그의 약한 부분이 또 다시 드러났다. 그는 모든 재물을 취하라는 소돔 왕의 유혹을 멋지게 물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약한 부분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았다.

그가 애굽으로부터 올라온 때로부터 그랄에 내려갈 때까지 일어난 어떤 일도 그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 그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일이 일어났다면, 틀림없이 그때에도 그는 여기와 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것을 결코 알 수 없다. 특별한 환경에 의해 그것이 밖으로 드러날 때까지 말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을 부인할 줄을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약한 부분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환경에 직면했을 때, 그의 약한 부분은 여지없이 밖으로 드러났다.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