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The Life of David 354] 대단원(사무엘하 24장) 본문

강해시리즈/다윗의 생애 (Life of David)

[The Life of David 354] 대단원(사무엘하 24장)

En Hakkore 2024. 3. 11. 11:23

성전 터의 매입

"이르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하니 다윗이 이르되 네게서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라 하는지라"(삼하 24:21).

여기에서 우리는 "의로운 자" 다윗을 보게 된다. 그는, 비록 왕이었음에도 또한 여호와로부터 그 특별한 장소에 제단을 세우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아라우나에게 공정한 값을 지불하겠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참된 영성의 영원한 징표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동료 인간들을 바르게 대한다.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 13:8)는 말씀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9)는 말씀의 필연적인 적용이다.

높은 지위도 환경의 압력도 아닌 어떤 이가 다른 이를 부당하게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해 줄 수 없다.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히 13:18)라는 말씀보다 못한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인이 삶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공생애 동안 그분을 가장 가까이 수행했던 이들은 다른 이들에게 친절을 강요하거나 호의를 구걸하지 않았고, 자기들이 먹을 것을 구매했다(요 4:8).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아뢰되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해서는 마당질 하는 도구와 소의 멍애가 있나이다"(삼하 24:22).

역대상 21장 23절의 설명은 좀더 명확하다. "오르난이 다윗에게 말하되 왕은 취하소서 내 주 왕께서 좋게 여기시는 대로 행하소서 보소서 내가 이것들을 드리나이다 소들은 번제물로, 곡식 떠는 기계는 화목으로, 밀은 소제물로 삼으시기 위하여 다 드리나이다 하는지라."

이것은 얼마나 고귀한 관대함인가! 그러나 나는 아라우나의 이런 관대함을 하나님의 측면에서 보고자 한다. 어떤 이가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 때, 우리는 그 사람 안에서 그런 친절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실 때 그분은 늘 선(線)의 양쪽 끝 모두에서 일하신다는 원리에 대한 또 다른 실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요구에 즉각 응할 마음을 먹게 하신 그분은 또한 이제 아라우나를 움직여 서둘러 나아가 다윗을 맞이하게 하셨다.

그분은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시면서 그것에 있는 한 과부로 하여금 기꺼이 자기의 음식을 그와 나누게 하셨다. 이 안에는 믿는 자들이 붙들기만 한다면 큰 위로가 될 만한 것이 들어 있다. 만약 하나님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신다면, 그분은 또한 계속해서 사람들이 우리가 전할 메시지를 받도록 준비시킬 것이다.🫰🧡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아뢰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삼하 24:23).

어떤 이들은 이런 말에 근거해 아라우나가 왕족이었다는 결론을 내려왔다. 왜냐하면 여부스 사람들은 시온 산의 원래 소유자들이었기 때문이다(삼하 5:6-9). 그러나 성경에는 이런 견해를 뒷받침해 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나는 이 구절을 아라우나가 왕다운 후한 마음을 갖고 행동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선한 왕과 선한 백성 사이에서 벌어진 아주 훌륭한 다툼이었다

그것은 다윗에게 주는 것이자 또한 여호와를 위한 것이었기에, 아라우나는 자신의 소유물을 팔지 않고 주려 했다. 반면에 다윗은 그것이 여호와를 위한 것이었기에 아라우나의 소유물을 거저 받지 않고 매입하고자 했다.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라는 아라우나의 말은 그가 신자나 여호와를 예배하는 자가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리라(마치 우상숭배 자가 시온 산에서 살도록 허락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믿음과 영적 분별력을 지닌 자였음을 보여 준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삼하 24:24a).🫰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이 사건을 하나님의 역사라는 견지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아라우나를 움직여 그토록 관대하게 행동하게 하신 것은 다윗에게 주님에 대한 그의 헌신을 드러낼 기회를 제공했다.

은혜로운 마음을 지닌 자는 자기가 아무 값도 치루지 않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않고, 또한 아무런 희생도 포함하지 않은 것을 참된 경건의 행위로 여기지도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열매"다.🧡

인간적인 본성은 모든 것을 아까워하며 가룟 유다처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마 26:8). 그러나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이삭"을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히 11:17).

그것은 또한 "사랑의 열매"였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께 드리기에 너무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여긴다- 자신의 값진 옥합을 깨뜨렸단 여인을 보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욕망을 죽이는 것은 참된 성도의 변함없는 징표들이다.

육체를 즐겁게 하기를 추구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다윗의 이런 말들을 가슴에 새겨 둘 필요가 있다.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삼하 24:24b).

대개 불신자들은 이 구절과 역대상 21장에 나오는 내용 사이의 불일치에 주목해 왔다. 거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는다. "그리하여 다윗은 그 터 값으로 금 육백 세겔을 달아 오르난에게 주고"(25절).

그러나 우리는 그 둘을 서로 다른 견지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사무엘서는 다윗이 타작마당과 소를 산 것에 대해 말하는 반면, 역대기는 그가 "그 터"-아마도 훗날 성전 부지가 될 오르난의 땅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리라-를 산 것에 대해 언급한다.

또한 다윗은 타작마당과 소를 위해서는 "구속"을 의미하는 "은"을 지불한 반면, 성전터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인 "금"을 지불했다. 영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은"에 경험적으로 익숙해지기 전에는 "금"의 가치에 대해 알지 못한다.

다윗이 성전 터를 위해 지불한 금의 양은 은의 양의 열두 배였다. 열둘은 이스라엘 온 지파의 수를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예표하는 것이다.💕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3 p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