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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fe of David 349] 대단원(사무엘하 24장) 본문

강해시리즈/다윗의 생애 (Life of David)

[The Life of David 349] 대단원(사무엘하 24장)

En Hakkore 2024. 3. 11. 11:20

중재자의 자세

앞 장에서 지적했듯이, 다윗은 마치 하나님을 향해 "목자인 나를 치시되, 양떼는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듯 했다. 아,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하나님은 다윗이 모든 이스라엘을 대신해 고통을 당하도록 허락하시지 않았다.

아니다, 다윗의 후손이자 주님이신 분 외에는 아무도 그런 놀랍고도 명예로운 대속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선한 목자, 즉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스스로 가난해지시고 또한 실제로 자기 양떼의 죄를 대신 지시고 그들을 위해 죽으신 분을 영적으로 얼마나 웅장하게 예시하는지 알 수 있다.💕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하니라"(대상 21:17b).

여기에서 다윗이 이스라엘을 그냥 "백성"이 아니라 "주의 백성"으로 언급하는 것은 사랑스럽지 않은가? 어리석은 짓을 했을 때 그는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여겼다. 그러나 지혜를 회복한 그는 이제 그들을 "주의 백성"으로 여긴다.

여기에서 나는 모든 복음 사역자들은 이 경우에 다윗이 했던 고백과 기도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토마스 스콧(Thomas Scott)은 다윗의 그런 마음의 움직임의 원리를 설교자들에게 적용한 바 있다.

"사역자들이 회중의 상태에 대해 슬퍼하는 동안, 때로 그들은[보다 공개적인 악이 그들의 사역에 오점을 초래하지는 않았을지라도] 혹시 자신의 나태, 오만함, 열성과 단순함의 부족, 자신에 대한 탐닉과 세상에 대한 순응 등이 자기들이 해온 노력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 것은 아닌지, 혹은 사람들을 보다 깊은 수치와 보다 뜨거운 기도와 보다 영적인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보다 깊은 헌신으로 이끌고자 했던 자신들의 교정 노력 때문에 사람들이 영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우리는 우리의 회중에게서 그런 복이 거둬지는 것보다는 우리 자신이 징계를 당하는 편을 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비록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들에게 그런 고통을 초래하도록 섭리하시는 것은 옳을지라도, 여전히 그들은 우리의 손에서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은혜는 사람들에게 다른 이들보다 늘 자기 자신을 비난하라고 가르친다. 또한 자신의 이익에 앞서 여러 측면에서 동료들의 이익을 구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여호와의 자비하심에 기꺼이 자신을 맡기는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품고 드리는 간절한 기도는 아주 효과적이다."

이제 다윗의 경우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그의 탄원이 여호와께 용납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토록 깊은 겸손, 자신의 잘못에 대한 가차 없는 시인, 철저한 자기 부인, 그리고 백성을 위한 간절한 탄원은 연민으로 가득 차 있는 분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중요했던 또 다른 경우에 모세의 이타심이 효력을 발휘했던 것처럼-그때 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시려거든 차라리 그분의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요구했다(출 32:32)-

자기 백성 대신 자기와 자기 집안에 하나님의 심판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던 다윗의 이타심 역시 동등하게 효력을 발휘했고 형세를 바꿔놓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사를 향해 "네 손을 거두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탄원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예표에 대한 설명을 아름답게 마무리한다. 즉 이것은 자기 백성을 위한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의 중재의 효력을 거부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실제적인 중요성을 지닌 또 다른 요소가 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천사를 보내셨더니 천사가 멸하려 할 때에[삼하 24:16의 표현대로 한다면,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대상 21:15).

그런데 이때 그분이 보신 것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다윗과 그의 신하들이 베옷을 입고 땅에 엎드린 모습이었다(16절)! 그분은 그것을 단순히 보신 것(saw)이 아니라 주의를 집중해서 보셨다(behold). 그리고 그 직후에 다윗의 탄원이 나왔다.

그러므로 여기에 우리의 마지막 교훈이 들어 있다. 하나님께 효력을 발휘하는 중재를 하는 자는 베옷을 입고 땅에 엎드리는 자다! 다시 말해, 다른 이들을 위해 탄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철저하게 겸손하고, 자신을 혐오하는 자리에 이르고, 다른 이들의 고통을 자신의 영혼으로 짊어지는 자다.🫰

만약 내가 나를 위해 누구의 기도를 얻고 싶은지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할 것이다. "산꼭대기에서 기쁨에 취해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다른 이들의 고통을 위해 탄식하는 자."

개인적으로 나는(영적으로 말해서) 혼인 예복을 차려 입은 사람들보다는 베옷을 입은 사람들의 탄원을 더 높이 평가한다.  오늘날 그토록 많은 기도들이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는 자들이 "베옷"을 입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 하나님 앞에 엎드린 사람들에게 필요한 거룩한 자극이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고 그분 앞에서 참으로 자신을 낮춘다면, 그때 우리는 고통당하는 다른 영혼들을 위해 중재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천사가 "네 손을 거두라"는 여호와의 말씀에 즉시 순종했던 것에 주목하라. 만약 천상의 존재가 그들의 창조주의 말씀에 그토록 순종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계시된 뜻에 얼마나 즉각 반응해야 하겠는가!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3 p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