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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43] 붉은 줄(여호수아 2:1-24) 본문

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43] 붉은 줄(여호수아 2:1-24)

En Hakkore 2024. 2. 12. 12:55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그런데 이제 문제가 제기됩니다. 라합이 자기 집에 묵고 있던 그 두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이었는가 한다. 그녀의 처신에 대해 상이한 견해들이 제시되어왔고, 그녀의 입장을 정당화시키고자 갖가지 논지들이 제시되어왔다.

훌륭한 주석가들 중 어떤 이들은 심지어 청교도들 중에서도, 여기서의 그녀의 처신은 무죄하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우리가 아는 한 그녀가 여기서 죄를 지었다고 명백히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독교 저술가에게 닥치는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백성의 과실들에 대해 논평하는 일이다. 한편으로는 자기 우월감이라는 바리새적인 잉크를 묻혀서 글을 쓰는 일이 있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악행을 가벼이 대하거나 비판해야 할 것을 용인해서도 안된다.

그 자신이 갖가지 연약함으로 둘러싸여 있고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자이므로, 형제의 과오를 다룰 때에 자신도 동일한 처지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으로서 성도에게 말씀을 전하거나 글을 쓰고 있다면,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신실함이니라"(고전 4:2, 개역개정은 "충성이니라"로 번역함. 역주)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요, 혹 거룩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을 의도적으로 낮추어 그것에 저촉되는 경우를 최소화하거나, 죄가 되는 것을 슬며시 숨기거나 한다면 이는 지극히 불충한 일이다.🌱

온유함으로든 의로움으로든 연민의 마음으로든 충정의 마음으로든, 어떤 식으로 처신하든 간에 많은 은혜와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성경의 신적 영감에 대한 많은 증거 중의 하나는 그 저자가 거기에 묘사되는 지극히 훌륭한 인물들의 행실을 현실과 진실의 색깔로 그린다는 것이다.

인간의 전기들은 거의 언제나 그 주인공들의 악행은 무시하거나 숨기고 덕행을 부각시키고 칭송하여 한쪽으로 치우친 시각을 제시하지만, 그와는 달리 성령께서는 지극히 훌륭한 성도의 약점들을 전혀 감추지 않고,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의 과오들을 성실하게 기록하게 하셨다.

물론 신약에서는 이들의 죄가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이들 모두가 어린양의 속죄의 피아래 있다는 충족하고도 복된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기록들이 구약 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경고를 준다.🫰

라합이 왕의 관리들에게 사정을 얼머무린 사실을 예수회 사람들(Jesuits)은 그들의 유해한 독단적인 가르침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는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이 그것인데, 곧 지향하는 목표가 훌륭하다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좀 의심쩍거나 심지어 악한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세기 동안 수많은 소위 "개신교도들"이 이런 원리에 사로잡혔고, 예를 들어, 젊은 청년들을 "예배"에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육신적이며 세상적인 기법들을 사용하는 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이 원리가 기독교 세계 전체에 사악하게 퍼져 있다.

그러나 "선이 오도록 악을 행하자"는 식의 정서는 참된 중생한 사람은 누구도 가질 수 없고, 오히려 그에게는 그것이 혐오스럽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정서로 행하는 자는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3:8)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로마 교황주의의 악명 높은 투사인 벨라민(Bellarmine)은 '교황적' (The Pontifice)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대담하게 선언하고 있다.

"교황이 악을 조장하거나 덕행을 금하여 잘못을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교회는 그 악을 선하다고 믿고 또한, 그 덕행을 악하다고 믿어야 한다(제4권, 5장).

어떤 이들은 라합이 극히 곤란한 입장에 처해있었음을 지적하며, 그러니만큼 그녀에 대해 상당히 너그럽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흔히, '상황에 따라 사안이 달라진다'는 것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처음 이 말을 한 사람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그 어떠한 '상황'도 선과 악 사이의 근본적인 구별을 없앨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릇된 일을 행하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으며, 또한 거짓말이 죄악된 것이므로 그 어떠한 상황도 거짓말을 정당화시킬 수가 없다는 점을 마음과 양심에 확고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 모든 행위가 그것들 자체로나 하나님 앞에서나 동등하게 사악하다는 것은 과연 참이다. 그러나 어떤 죄들은 심지어 종류가 같은 죄라도 그 위중함이 다른 죄보다 더 크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하는 거짓말이 사람에게 하는 거짓말보다 더 위중하며(행 5:4), 고의적으로 악의를 갖고 하는 거짓말이 시험을 받아 갑자기 내뱉는 거짓말보다 더 위중한 것이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113

• 사도행전 5장 4절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