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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fe of David 261] 과도한 슬픔 1(사무엘하 18장) 본문

강해시리즈/다윗의 생애 (Life of David)

[The Life of David 261] 과도한 슬픔 1(사무엘하 18장)

En Hakkore 2024. 3. 5. 19:14

애타는 기다림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파수꾼이 성 문 위층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홀로 달려오는지라"(삼하 18:24).

이 얼마나 애처로운 장면인가! 늙은 왕이자 수심 깊은 아비인 다윗이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섭리가 자신이 너무 약해서 악을 행한 자에게 내리지 못했던 의로운 징벌을 수행하시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그 죄인이 징벌을 면하기를 헛되이 바라고 있었다. 그곳에 앉아 여러 시간 동안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그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또 그는 바로 그 죄가 이 불행한 싸움, 즉 이스라엘을 두 개의 적대적인 분파로 영구히 분열시킬 수 있는 심각한 싸움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앞을 내다보고 우리의 행동의 결과를 예측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런 미친 그리고 죄악된 길로 접어드는 일 앞에서 주저하게 될 것이다.

"파수꾼이 외쳐 왕께 아뢰되 그가 만일 혼자면 그의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그가 점점 가까이 오니라 파수꾼이 본즉 한 사람이 또 달려오는지라 파수꾼이 문지기에게 외쳐 이르되 보라 한 사람이 또 혼자 달려온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삼하 18:25-26).

왕은 이제 곧 기다리던 소식을 듣게 될 것이고, 가장 좋은 소식과 가장 나쁜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성벽에 앉은 파수꾼이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다고, 그리고 이어서 또 다른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다고 보고했을 때, 다윗은 자기 군대가 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라면 그의 군사들이 혼란에 빠져 이리저리 흩어진 채 적들 앞에서 내달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두 사람은 왕에게 특별한 소식을 가져온 자들이 분명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말(馬)을 키우는 것을 금하셨고, 그렇기에 전령들은 자기들의 발로 달려야 했다.

"파수꾼이 이르되 내가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 가져오느니라 하니라"(삼하 18:27).

요압은 먼저 구스 사람을 보냈으나, 그 후에 아히마아스의 집요한 요구를 받아들여 그 역시 왕에게로 보냈다(22절). 아히마아스는 지름길을 택했고, 그 결과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 갔다"(23절). 제사장의 아들이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다른 저자들이 지적했듯이, 이것은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준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 좋은 사람들이어야 한다. 아, 그동안 복음을 선포하는 많은 이들의 삶이 일관성이 없고 세속적인 까닭에 얼마나 해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복음의 조롱을 받아 왔던가!🥺

그리스도의 종들이 자신들이 설교하는대로 실천하는 것, 그리고 고결하고 의로운 삶을 삶므로서 그들을 듣는 사람들로부터 확고한 신뢰를 얻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삼하 18:28).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는"(벧전 2:17) "좋은 사람"(27절)이었다.

첫째, 그가 한 "모든 것이 잘됐습니다"(all is well", KJV-역주)라는 말은 다윗에게 그의 군대가 성공을 거뒀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주군에게 절을 하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것은 경건하고도 신중한 태도였다. 왜냐하면 그의 말은 다윗의 마음을 압살롬으로부터 여호와께로-그분은 자비롭게 개입하셔서 그의 적들을 물리쳐 주셨다-돌리기 위해 계산된 말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누군가에게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사망 소식을 알려야 하는 사람들이 유념해야 할 아주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다. 슬픔에 잠긴 사람의 마음을 오직 그분의 손 안에서만 "사망에서 벗어남"(시 68:20)이 가능한 분에게 돌리라.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물러나 거기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서 있더라"(삼하 8:29-30).

다윗의 질문은 그가 자기 나라의 안녕보다 자기의 사악한 아들의 안녕에 대해 더 염려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심각한 실패였다. 공적 책임을 맡은 자들은 종종 그들 자신의 사적인 감정과 이익을 밀쳐 두어야 한다.

아히마아스는 왕에게 즉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윗을 너무나 사랑했고, 의심할 바 없이, 가능한 한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식으로 말을 얼버무린 것은 어떤 식으로든 변명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설령 그것이 근심에 가득 찬 사람의 긴장을 해소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자를 위로하려는 것일지라도 그러하다.🤥

"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같이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삼하 18:31-32).

이제 두 번째 전령이 도착해 아히마하스가 한 말, 즉 여호와께서 왕을 위해 은혜를 베푸셨다는 말을 확증해 주었다. 그의 말 역시, 비록 첫 번째 사람의 그것처럼 열정적이지는 않았지만, 경건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 역시 모호했기에 다윗은 자기 아들에 대한 질문을 반복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질문은 분명한 답을 얻었다 - 비록 그것이 가슴 아픈 내용 현명하게 감추기는 했을지라도 말이다. 구스 사람은 요압이 압살롬의 심장에 창을 찔러 넣은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그의 시체가 구덩이에 던저져 큰 돌무더기로 덮인 것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압살롬이 이제 무덤에 묻혔기에 더 이상 왕국에 대해 아무런 해도 끼칠수 없다는 것을 암시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다른 모든 반역자들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충성스럽게 말했다.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3 p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