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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fe of David 258] 압살롬의 죽음 2(사무엘하 18장) 본문

강해시리즈/다윗의 생애 (Life of David)

[The Life of David 258] 압살롬의 죽음 2(사무엘하 18장)

En Hakkore 2024. 3. 4. 13:17

반역의 결말

"그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그를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삼하 18:17).

이것은 얼마나 처참한 결말인가? 그는 나무에 메달렸고, 추종자들에게 버림 받았고, 요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시신은 아주 크게 조롱당했다. 그는 왕의 아들로서 명예롭게 매장되기는커녕 죄인으로서 치욕스럽게 처리되었다.

사람들이 그를 큰 구멍에 던진 것은 그들이 그의 시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반면에 그들이 그의 시신 위에 큰 돌무더기를 쌓은 것은 그가 반역하는 아들로서 돌에 맞아죽어야 마땅했음을 의미한다(신 21:18, 21).🥹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삼하 18:18).

이 두 구절(17절과 18절-역주)은 얼마나 놀랍고 엄중한 대조를 이루며, 또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라는 원칙에 대한 얼마나 강력한 본보기를 제공하는가! 그 원칙은 하만과 느브갓네살의 이야기에서도 적용되었고,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압살롬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다(삼하 14:27).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아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렇기에 압살롬은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기릴 비석을 세워 자신에 대한 기억을 남기고자 했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자신의 몸이 그 비석 곁에 묻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 하나님의 승인을 얻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미래 세대의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자 하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그러나 압살롬의 계획은 죽어서까지도 방해를 받았다. 그가 묻힌 곳을 알려 주는 유일한 표시는 그의 사악함을 기념하는 커다란 돌무더기뿐이었으니 말이다.

아히마아스의 지혜

"사독의 아들 아히마하스가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삼하 18:19).

아히마아스는 제사장 사독의 아들이었고(삼하 15:27), 다윗에게 깊이 헌신하고 있는 자였다. 그는 압살롬의 계획을 다윗에게 알려주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주 사람 중 하나였다(17:17-21). 그가 경건한 자였다는 사실은 그가 이 경우에 사용한 말을 통해 암시된다.

왜냐하면 그는 요압이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끈 것을 축하하며 그에게 아첨하기보다는 그 성공을 여호와의 덕분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승리의 열기 속에서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잊는가,

또 오만한 자들은 얼마나 자주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시 98:1)라고 외치기는커녕 자기들의 적이 패한 것이 자기들의 힘과 부지런함과 재능 때문이라고 여기는가!

그러나 그런 경우에 하나님의 종들은 목소리를 높여 영광이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다는 진리를 널리 알려야 한다.👏

"요압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삼하 18:20).

이어지는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요압이 아히마아스의 요청을 거절한 이유가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곧 다른 사람에게 왕에게 가서 그가 본 것을 알리고 명령했고, 아히마아스가 재차 동일한 요청을 하자 잠시 머뭇거린 후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요압이 아히마아스의 목숨에 대해 염려했고, 그가 하찮게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요압에게 선택된 전령-그는 "구스 사람"(21절)이었다-은 에디오피아인, 즉 아프리카 출신 노예였기 때문이다.

요압은 다윗이 충동적이며 쉽게 폭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사울의 사망 소식을 전했던 자가 당한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삼하 1:15). 그렇기에 그는 아마도 다윗에게 압살롬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도 비슷한 운명이 닥치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거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삼하 18:22).

이 구절에 대한 난외주는 내가 위에서 말한 내용을 분명하게 확증하는 듯 보인다. 아히마아스가 한 "아무쪼록"(22a절) 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어찌되든" 이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왕의 진노를 일으키는 위험을 무릎쓰고서라도 기꺼이 사실을 알리겠다는 결의에 대한 표현이다.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22b절)라는 요압의 말은 그가 얼마간 아히마아스를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너는 준비된 소식도 없으면서"(22c절, KJV, thous hast no tidiongs ready-역주)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좋은 소식도 없으면서"(no tidings convenient)로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요압이 아히마아스를 낙심시켜 다윗에게 환영받지 못한 소식을 전달하는 자의 역할을 맡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아히마아스가 이런 무서운 소식을 전하는 자의 역할을 그토록 열심히 떠맡으려 했었는가" 하고 물을 수밖에 없다.

나는 그것이 그가 다윗에게 너무나 헌신했기에 가능한 한 재치 있게 다윗이 입을 충격을 완화시키려 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그는 퉁명스럽게 압살롬이 살해되었다고 불쑥 말하지 않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삼하 18:28)라고 말했다.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3 p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