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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219] 속임수 중의 존귀(수 9:1-27) 본문

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219] 속임수 중의 존귀(수 9:1-27)

En Hakkore 2024. 8. 13. 21:45

여호수아 9:1에서 성령께서 그 왕들의 서로 다름을 꼬집어 언급하시는 것이 매우 놀랍다.

산악 지역의 왕들과, 골짜기 지역의 왕들과, 또한 해변 지역의 왕들이 두루 언급된다. 그처럼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상대하고자 동맹을 맺은 것이다.

이는 온갖 종류의 영적인 대적들이, 온갖 형체의 세상적인 것들이-지극히 세련되고 고상한 것들도 있고 지극히 저급하고 추잡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대로 공격한다는 것을 실례로 보여 준다.  그들 자신의 악한 정욕들도 마찬가지로 다양하고 그 수가 허다하다.

악의와 교만. 불신앙, 게으름, 비겁함, 조급함, 불만 등 온갖 것들을 다 무찌르고 죽여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분열되어 있으니, 이처럼 이교도 민족들이 하나로 뭉치는 사실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껴야 마땅하다.

그리고 이들이 이스라엘을 대하여 대적하여 하나로 뭉치는 것을 보고서, 신자는 자신이 싸우도록 부르심을 받은 싸움에 임하면서 자신의 모든 은혜가 함께 발휘되도록- 믿음이 소망을 강하게 하고, 사랑이 믿음과 소망이 활력을 주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마땅하다.👌

이 왕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잠잠히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육신적인 이성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들이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을 위하여 행하신 그 강력한 역사들을 목격했는데도 이런 공격 계획을 세운다는 것이 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여호와께서는 그 이면에서, "너의 민족들아 함성을 질러 보아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사 8:9)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원수들도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이 거둔 최근의 승리들에 대해 가나안 족속들이 보인 두 번째 대응을 살펴보아야겠다. 이번에 대응은 그 전과 매우 다르며 여호수아 9:3-6에 기록되어 있다. 본문은 이렇게 말씀한다.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의 행한 일을 듣고,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그 발에는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준비하고, 그들이 길갈 진영에서 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먼 나라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니"(수 9:3-6).

여호수아 10:2에서는 "기브온도 왕도와 같은 큰 성임이요 아이보다 크고 그 사람들은 다 강함이라"고 보도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스라엘을 두려워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목도한다.

바로 앞 절에 언급된 왕들의 경우와는 달리 하나님이 기브온 사람들을 "크게 두려워하게"(창 35:5) 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무렇게나 변덕스럽게 행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지혜로우신 이유들로 인해서 기브온 사람들이 예외가 되게 하신 것이다.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수 9:3).

이는 여호수아 2:9-10에서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한 다음에 말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수 2:9-10).

여기서 이 역사의 일관성과 진실성을 입증해 주는 실례를 보게 된다. 영적으로 생각하면, 이는 다음의 원리를 실증해 준다. 곧 불신 세계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들의 불신앙이 더더욱 용서받을 수 없으며 그들이 죄과를 더욱 가중시킨다는 원리가 그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어느 한 모퉁이에서 은밀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므로 심지어 그분을 반대하는 원수들조차도 그 이적들을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고(요 11:47), 헤롯 역시도 그 사실을 보고 받았다(눅 23:8).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간섭하시는 섭리들도, 그분의 택하신 자들 속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도, 똑같다. 어느 때든지 성령의 능력이 명확하게 충격적으로 드러날 때마다, 중생하지 않은 자들 중에 그 일로 감동을 받고 매료되어 자신도 그런 일을 누리게 되고자 가담하는 자들이 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그런 사례를 본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유효적인 부르심을 경험했고, 이것이 초자연적인 효과를 내게 된다. 그가 자기 집을 떠나고 자기 조상의 땅을 버릴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특별히 구별되는 역사를 행하신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에게 "내가 그를 불렀노라"고(사 51:2) 말씀하시니 말이다. 그런데도, 그의 아버지와 조카가 아브라함이 변화되어 과거의 삶의 양식과 완전히 결별하기로 결단하는 것을 보고서 그의 아버지와 조카가 크게 감동을 받아, 그가 갈대아를 떠날 때에 함께 그를 따라나선 사실을 보게 된다(창 11:31).

물론 그의 아버지는 가나안에 이르기 전에 죽었고, 그의 조카 역시 가나안 땅에서 전혀 행복을 누리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와 비슷하게,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을 떠나 그들의 기업을 향해 나아갈 때에 "수많은 잡족...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출 12:38),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악한 영향을 미쳤다(민 11:4).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들이 고레스의 칙령에 의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후에 모세의 율법이 회복되었을 때에, 그들이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으니 말이다(느 13:3).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4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