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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218] 속임수 중의 존귀(수 9:1-27)
En Hakkore 2024. 8. 13. 21:44앞에서 우리는 여호수아 9장 첫 머리의 "그리하여" 라는 단어가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곧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첫째, 여호수아 8장 말미에 기록된 내용- 이스라엘의 새 세대가 에발산에서 십계명을 높이 기리고 모세 언약을 갱신한 일-과 연결된다는 점을 암시하며,
둘째, 여리고 성과 아이 성 정복에 관한 여호수아 6-8장의 내용 전체와 연결된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호수아 9장의 내용들은 그 사건들에 대한 원수들의 반응을 알려 준다는 것이다.
사건들이 두 가지였으니 원수들이 반응도 두 가지였다.
첫째, 가나안 왕들은 소식을 듣고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맞서서 싸우기"를 도모했다. 그때까지 그들은 수비적으로 처신했으나, 이제 그들 자신이 위협을 받게 되니 이스라엘을 상대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수 9:1)에 사용되는 갖가지 표현들은 서부와 북부의 경계선에까지 걸친 그 땅의 모든 거민을 포함한다"(토마스 스코트).
즉각적인 공격이 계획된 것은 아니었으나, 이스라엘의 전진을 중단시키고 그들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는 최선의 전략이 무엇인지를 함께 논의한 것이었다.
과연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다"(전 1:9). "민족들의 동맹" 혹은 모든 역량을 합치기 위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로 뭉치는 일은 현대에 생긴 일이 아니고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일이다. 경쟁적인 왕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하나가 되었다.
이들은 서로 지원하고 도와서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기로 "최정상급"의 합의를 도출했고, 여호수아 9:1-5에 나타나는 대로 그 합의를 실행에 옮겼다. 잠시 자기들을 각자가 차이를 기꺼이 내어놓고 함께 연합한 것이다. 이때에 처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그 이미 그런 일이 있었다.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왕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창 14:1-3).
이는 "서방 민족들"이 "동부의 세력"에 맞서는 "서부 민족 동맹"이었다 하겠다. 그리고 더 후대에 가서 여러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한마음으로 의논하는 일"이 있었다 (시 83:4-8을 보라).
여호수아 9:1-2에 기록된 내용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이들에게는 과연 실질적인 가치가 있다. "미리 경고를 받는 것이 미리 이기는 길이다" 라는 옛 격언에는 과연 지혜가 담겨 있다. 특정한 조치가 적에게 어떤 효과를 낼지에 대해 신빙성 있는 정보를 얻는 것이 정말 큰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와의 언약을 엄숙히 갱신한 직후에 그런 조치가 취해지는 것을 본다. 이것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곧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책무들을 가장 의식하고 있고, 은혜로 그 책무들을 시행할 결심을 가장 크게 하고 있고, 여호와께 자신들을 거룩히 드리고자 하는 열정으로 충만해 있을 바로 그 때에, 사탄의 분노가 가장 맹렬하게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지금까지는 이 가나안의 왕들은 침묵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들이 공격을 계획한다. 이들이 애초에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널 때부터 그들을 경계하여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스러운 일이다.
이스라엘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들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수 2: 9, 10). 그리고 이들은 여리고가 여호수아 휘하의 이스라엘에게서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을 때에 그 성을 전혀 지원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왕들이 하지 않은 일을 주목하기 바란다. 이들은 이스라엘에게 항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중과부족이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여호수아의 자비에 자기들을 내어맡기지도 않았다. 요단강을 건넌 일과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일이 모두 이적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고 나서도 그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의 대적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에게 놀랍고도 엄청난 승리를 주시더라도, "이제 죄악의 싸움은 지나갔구나" 라는 식으로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사단의 활동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영구 운동 기관" 과도 같다. 그는 패배를 받아들이는 법도, 싸움터에서 도망치는 법도 없다.
사람이라면 임마누엘을 공격하는 일이 전혀 헛되다는 것을 인정할 법 하지만, 사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공격이 완전히 무력화된 후에도 사탄은 그저 "얼마 동안"(눅 4:13) 그리스도를 떠났을 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어째서 자기의 경우는 예외일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단 말인가!
"육체"와 그 모든 악한 정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내주하는 죄는 절대로 새 사람에게 굴복하지 않을뿐더러 공격을 그치는 법도 없다. 그리스도인이 영적 유산을 체험하고 그것을 누리는 데서 더 깊이 나아갈수록 싸움이 더 맹렬해지고 그를 무너뜨리려는 원수들의 노력도 더욱 결연해지고 사나워지는 법이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467
👌시편 83장 4-8절
"말하기를 가서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그들이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사람이요 앗수르도 그들과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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