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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216] 속임수 중의 존귀(수 9:1-27) 본문
[Gleanings in Joshua 216] 속임수 중의 존귀(수 9:1-27)
En Hakkore 2024. 8. 13. 21:431. 원수들의 대응
"이 일 후에 요단 서쪽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 연안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들이 이 일을 듣고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맞서서 싸우려 하더라"(수 9:1,2).
본문을 언뜻 보면 8장 마지막 부분에 묘사된 일 뒤에 곧바로 이어지는 내용을 이처럼 상세히 기록하는 것이 별로 적절치 못한 것 같다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독자라면 본문이 "그리하여"(개역개정에는 나타나지 않음. 역주)로 시작된다는 점을 눈여겨 볼 것이고, 또한 앞의 글들을 계속 읽어온 분들은 여기서 그것이 주는 의미를 알 것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앞의 내용과 연결시키는 문구가 붙어 있으므로, 그 바로 앞의 내용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그 연결점이 더 잘 드러날 것이다. 사건들의 순서를 제대로 파악하게 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보다 특별히 본문이 제시하는 영적인 교훈들도 더 확실히 접하게 될 것이다.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과 소유에 대한 단순한 역사적 기록만이 결코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이 싸워 가야 할 영적 싸움을 모형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그분의 "증인"(행 1:8)- 그분을 향한 찬송을 드러내며, 도덕적으로 완전한 그분의 성품의 면모들을 반영하는-이며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계 14:4) 그분의 제자들일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병사들이기도 하며(딤후 2:3), 따라서 특히 여호수아서에서 제시하는 교훈들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면 여호수아 9:1-2에 기록된 내용에서 이끌어 내야 할 교훈들은 어떤 것일까?
이 절들과 그 문맥 사이에 두 가지 연결점이- 바로 앞의 본문들과, 또한 좀 더 넓은 문맥과의 연결점이- 나타나는 것에 준하면 두 가지 교훈이 있다 하겠다.
다시 말해서 가나안 왕들이 함께 모여 이스라엘을 향해 연합 공격을 감행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은 먼저 여호수아 8장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는 내용- 곧, 이스라엘의 새 세대가 에벨 산에서 십계명을 높이 기르고 여호와와 언약을 맺은 사실-과 관련되고, 그 다음에는 여리고와 아이를 함락시킨 이야기가 전개되는 여호수아 6-8장 전체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서두의 "그리하여"가 여호수아 9:1 마지막의 "이 일을 듣고"와 연결된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바로 여호수아 6-8장의 사건들에 대한 원수들의 반응이다.
이에 대한 기록이 비록 간결하지만, 이 두 구절은 자신의 소명을 신실하게 감당하기를 소원하는 목회자들이 특히 염두에 두어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을 제시한다 하겠다.🍒
성령께서 에발산과 그리심산에서 일어난 일을 묘사한 직후에 가나안 왕들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 동맹을 맺은 이 사실을 언급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인간의 적대적 자세에 대한 엄중한 실례를 모형적으로 제시한다.
여호수아가 에발산에 제단을 세웠고 그 돌들 위에 여호와의 십계명을 새겼다- 이로써 십계명이 그 땅의 법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대로 공동 전선을 형성하고 무력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일을 듣고"(수 9:1)가 분명히 시사해 준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권리와 권세를 시인하고 스스로 그가 계시하신 뜻에 굴복하는 것이야말로, 중생하지 않은 자들이 분개하며 또 반대하는 일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주인이 되기를 바라며, 고집스럽게 자기들의 길을 추구한다. 이들 모두가 행동으로 표현했고, 또한 실제로 많은 이들이 입으로 외치는 언어는 바로 자기 의지에 사로잡힌 교만한 바로의 말과도 같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겠느냐"(출 5:2).
그들은 자기들이 기뻐하는 대로 행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인간의 부패성이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 죄란 하나님을 상대로 반기를 드는 것이요, 그에게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죄는 자기 자신의 성향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것이요, 동시에 우리의 창조자요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 선언은 말할 수 없이 엄숙하며, 또한 인간의 감수성에 지극히 역겨운 것이다. 그런데도 이는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증거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제시된다.
"이는 (자연인의 생각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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