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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220] 속임수 중의 존귀(수 9:1-27) 본문

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220] 속임수 중의 존귀(수 9:1-27)

En Hakkore 2024. 8. 13. 21:45

여호와께서 그 땅에서 행하신 그 놀라운 역사들에 즈음하여 이처럼 가나안 족속들이 두 가지로 반응한 사실에서(한 번은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무력을 사용하기로 결의했고, 또 한 번은 우정을 가장하여 이스라엘과의 연합을 꾀한 일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철천지원수가 취하는 두 가지 원칙적인 대응 전략과 방법의 실례를 보게 된다.

성경은 마귀를 울부짖는 사자로도, 교활한 뱀으로도, 묘사한다. 사자의 모습으로는 무력을 사용하여 공포를 조장하려 한다. 그리고 뱀의 모습으로는 간교하게 독을 퍼뜨리고 부패시키는 공작을 실행한다. 사자의 모습으로는 공개적으로, 겉으로 공격해온다. 그러나 뱀의 모습으로는 은밀하게 공격하고 내부로부터 부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상대할 때에는 거짓말로 속이는 뱀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나, 가인을 동원하여 의인 아벨을 죽일 때에는 사자의 힘과 잔인함이 드러나는 것이다(요일 3:12).

여기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가나안 왕들을 부추겨 여호수아를 상대로 싸우도록 만들 때에는 사탄이 무력을 사용하는 데에 의존했으나, 기브온 사람들을 움직여 그들의 정체를 숨기고 거짓으로 꾸며서 이스라엘을 속여 그들과 조약을 맺게 만드는 데에서는 자기의 누룩을 떡에다 섞어 놓으려 하는 그의 잔꾀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 본문들에서는 하나님이 고정적인 계획에 따라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지적을 자주 한다. 그러나 그런 무한한 다양성이야말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특징이다. 마귀의 경우도, 물론 그 정도가 덜하다. 하지만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의 역사 전체에서 거듭거듭 입증되듯이, 한 가지 계획이나 방법이 실패하면 그에게는 언제나 또 다른 것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상대할 때에는 그가 전술을 바꾸었다. 먼저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공작을 시행했고. 그 다음에는 빛의 천사와 흡사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분을 시험했고 그 다음에는 어둠의 권세로서(눅 22:53), 그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 것이다. 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공개적으로 직접적으로 박해하고, 그 다음에는 아첨하고 속이며, 그 다음에는 거룩하지 못한 조약을 통해 부패시킨다. 네로를 비롯한 로마 황제들의 잔혹한 반대가 실패하자,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의 후견인 노릇을 자처하여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만듦으로써 사단의 계략을 성공시켰고, 또한 그로부터 여러 세기 후에는 독일의 군주들이 지원을 받게 되어 정치적 자유를 누리게 되면서 루터를 통해 일어난 위대한 종교개혁의 영성과 권능이 약화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이 "우리 손에 있는 한"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1) 라는 사도의 선언은 전혀 놀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지난 19세기의 역사가 우리 앞에 있으므로, 사탄의 전략에 대해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에 대해 핑계를 댈 수가 없는 것이다.

여호수아 9: 3-6에 기록된 부정직한 기브온 사람들의 일에 관한 내용은 겉모양만 있고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대열에 "가담"하고자 하는 현상을 모형적으로 그려준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체를 액면 그대로 이스라엘 앞에 드러냈다가는 자기들의 원하는 바를 이룰 가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서, 자기들의 모습을 위장하는 속임수를 썼다.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수 9:4).

사탄이 매우 교묘하지만 육체 역시 지극히 간교하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갖가지 일을 꾸밀 능력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야곱이 털 가죽으로 에서로 가장했고, 사울 왕이 스스로 위장하여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만났고(삼상 28:8), 여로보암의 아내가 신분을 감추고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아히야 선지자를 만났으며(왕상 14:1-6), 그리스도의 시대에 늑대들이 양의 옷으로 가장하는 예들을 잘 보아야 한다.

바울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에 대해 고린도의 성도에게 경고했고(고후 11:13), 또한 유다는 성도의 회중에 "가만히 들어온" 불경한 자들에 대해 경고한다(유 1:4).

오늘날에는 교회 안에 그런 자들이 가득하다. 기브온 사람들은 "사자"로 가장한다. 이들은 자기들을 평화로운 의도를 지니고 방문한 사람들로, 이스라엘과 공식적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언약을 맺는 중요한 인물을 행하기에 합당한 자들로, 위장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회원이 되려는 수많은 외식자들이 바로 이런 식으로 위장한다. 이들은 스스로 주의 백성들의 교제의 장에 소속되기에 합당한 자격 요건을 갖춘 것처럼 처신하며, 하나님의 평화가 자기들의 마음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기브온 사람들은 먼 나라로부터 온 사람들처럼 꾸미고 나타났다. 그들은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그 발에는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준비"했다.

그런 위장 작업이 매우 철저해서, 정말 그럴듯해 보였다. 이들은 심지어 말이 아니라 나귀를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 특유의 습관에 맞추기까지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헛된 거짓 신자들도 자기들의 품행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도 않은 내적인 은혜를 꾸며대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의 백성을 속이려 든다.

마치 자기들이 "심령이 가난"하고, 죄를 깨닫고 있으며, 또한 생명의 떡으로 인하여 주려 있는 것처럼 처신하고, 자신들의 무가치함에 대해 떠드는 것이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외식자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기도로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엄하고도 시급하게 경고해 주며, 동시에 개개인 그리스도인이 그 속에 있는 원수들에게서 영향을 받을 위험이 상존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정욕들이 온갖 다양한 모습을 취할뿐 아니라 우리의 친한 친구인 체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으로부터, 또한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른다는 것"(갈 5:17)을 잘 알지만, 자기 자신의 부패한 모습들이 덕스러운 모습을 위장하여 그 자신의 선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식으로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의 악한 정욕들이 한 동안 적극성을 띠지 않도록 하고, 심지어 잠든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경건한 겉옷으로 치장하고 더 나은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성소의 균형을 좇아 모든 것의 무게를 달아보고 성경 말씀으로 자기의 동기들을 엄정하게 테스트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뜻을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열정으로 착각하거나, 자기의 조급함을 과연 신령한 진지함으로, 혹은 자기의 게으름을 거룩한 신중함으로 착각하기가 지극히 쉬운 법이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4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