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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212] 아이성 정복(수 8:1-35) 본문

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212] 아이성 정복(수 8:1-35)

En Hakkore 2024. 8. 13. 21:41

에발산에 쌓은 돌무더기는 죄인들을 심판하기 위해 던져질 것이 아니었고, 죄인들을 위해 제물을 드리는 제단이 되었다. 제단의 돌들에 대한 금지 명령이 매우 분명했다.

"그것에 쇠 연장을 되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내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다듬지 않은 통째의 돌은 구주 예수님의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시는 대로 그분의 굴욕과 완전하심을 나타냈다. 이스라엘의 육신의 눈에는 그에게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그에게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그는 "보배로운 모퉁이 돌"이셨고, 그에게 "기뻐하심을 받는 분" 이셨다.

그리스도의 삶에는 쪼아 내어야 할 부분이 하나도 없는 완전한 삶이었다. 그분의 행위에는 수정되어야 할 사항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

출애굽기 20:25이 선언하는 대로,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할 뿐이었다. 그리스도의 행위 중 어느 하나도 더 좋게 다듬을 수가 없었다. 만일 그분의 삶 전체에서 조금이라도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면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을 것이다.

우리 주님의 속옷이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요 19:23)이라는 사실에서도 이와 동일한 상징적인 면이 드러났다. 그 제단이 세워진 시점이나 그 제단의 재료들이나 더 두드러지는 것은 그것이 세워진 에발 산이라는 장소였다.

이스라엘이 도착한 곳에는 두 개의 산 -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있었는데, 우리는 자연히 그 제단이 그리심 산에 세워질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에발 산에서는 저주가 선포된 반면에 그 곳에서는 순종하는 자들에게 율법의 복들이 선언되었기 때문이다(신 11:29).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완전하며"(삼하 22:31, 개역 개정은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며"로 번역함. 역주).

따라서 여기에 모든 하나하나가 그렇게 시행된 것은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도 가장 복된 제사의 사건을 예표하기 위함이었다. 에발 산에서 드려진 각양 제물들은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저주의 처소에 들어가심을, 그분의 지체들을 위해 친히 저주를 지심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묘사되는 내용은 시내산의 제단(출 24:4)과 매우 흡사하며, 똑같이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요 보배로운 것이었다. 신명기 27:4-7의 말씀은 두 제단 사이의 유사점을 더욱 완전하게 보여 준다.

여호와께서는 에발 산에서 화목 제물을 드린 후에 "(그 화목 제물을)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신 27:7)고 명령하셨는데, 그들에 앞서서 그들의 선조에게 시내 산에서 똑같이 그렇게 했다(출 24:11). 그때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게 드러났던 것이다.

저주의 산에서 즐거워하다니, 과연 누가 이를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수 8:32).

이 역시 신명기 27:8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한 놀라운 일이었다. 그 제단은 이스라엘의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거둔 승리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기록된 십계명의 판본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거기서 얻을 위대한 실천적 교훈은 하나님의 자비를 기념하는 최고의 방법은 바로 그분의 율법을 잊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거널(잉글랜드의 청교도 목회자 William Gurnall(1619-1679)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 역주)이 훌륭하게 말씀했듯이, "우리 삶의 성품으로 읽을 수 있도록 기록되지 않은 것은 잊혀진 자비로 여기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는 제단의 돌에 십계명을 기록한 일은 그들이 가나안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고 그들 스스로 엄숙히 서약한 율법의 조건들에 따른 것임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었다(신 11:29-32).

이 두 가지는 분리시켜서는 안 되었다. 제단의 제물을 드리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었고, 돌 위에 기록된 율법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요, 그분의 거룩한 강령들을 그들에게 강력히 심어 주시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율법의 형벌로부터(율법의 계명들에 대한 순종으로부터가 아니라) 구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신명기 27:28에 대하여 존 길(John Gill 1697-1771)은 다음과 같이 적절히 설명한다.

"율법을 돌들 위에 기록한다는 것은 율법의 지속성을 나타내 준다. 율법은 구약 시대나 요한의 시대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시기만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백성을 그 저주와 정죄로부터 구속하셨지만, 그런데도 그것이 여전히 그 백성들이 생활과 처신을 지도하는 하나의 규범으로 그분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율법은 복음의 도리로 인해 무효가 된 것이 아니다. 복음만큼 율법에 대한 순종을 강화시키는 것은 없다. 도덕법은 본질상 불변하며 항구적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길을 흠모하는 이들 중에 그분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토마스 스코트 역시 이렇게 말씀한 바 있다.

"우리는 위대한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속죄에 소망을 걸어야 하며. 동시에 계속해서 우리 앞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감사의 순종을 드리는 법칙으로 삼아 지켜 나가야 한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455

♥ 신명기 27장 4-7절.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