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Gleanings in Joshua 208] 아이성 정복(수 8:1-35) 본문

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208] 아이성 정복(수 8:1-35)

En Hakkore 2024. 8. 13. 21:39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수 11:20).

드보라는 바락에게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내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삿 4:7).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눈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이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라"(겔 38:16).

그가 노여움으로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이다(18절).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욜 3:2).

아이 성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본문 16절에서 "유인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예레미야 32:24에서는" 넘긴 바 되었으니"로, 예레미야 12:12에서는 "삼키니"로, 욥기 18:14에서는 "뽑히며"로 번역된다.

"아이와 벧엘에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아니한 자가 하나도 없으며 성문을 열어 놓고 이스라엘을 추격하였더라"(수 8:17).

아이 성의 왕이 미친 정신에 버려졌다는 또 다른 증거가 나타난다. 그는 성을 방비할 최소한의 인원도, 비상 상황이 발생할 경우 퇴로를 도울 인원도, 전혀 남겨두지 않고 휘하의 모든 병력을 다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추격한 것이다.

이 왕의 어리석음의 비견되는 경우는 오로지 바로 왕의 어리석음 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여호와의 권능과 그분의 진도가 명백히 드러나는 것을 친히 목격했으면서도, 아들이 죽자 곧바로 이스라엘을 추격했고, 홍해를 통과하려 했다. 두 경우 모두 교만과 완고함에 눈이 멀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17절을 잘 살펴보면 아이 성의 사람들이 자기 의지로 성 밖으로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이처럼 언제나 사람의 자유 행위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이 두 가지 면을 함께 제시하면서도, 그 두 가지의 "일관성" 에 대해 철학적인 해명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저항할 수 없도록 끌어내시지만, 반면에 사람의 의지의 활동을 조금도 해치지 않고 인간의 책임을 조금도 저해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부인한다면. 이는 성경의 분명히 계시되어 있는 사실을 근거도 없이 배격한다. 이러한 사실은 분명히 깊은 신비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것을 거부한다면 이는 부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히 납득할 수 있는 것만을 믿는다면 우리의 신조는 지극히 작아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의로 처신한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 자체가 증언한다. 불경한 자들도 때때로 "높은 권세"가 이런저런 일을 행하게 했다는 식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17절의 내용을 성도의 영적 싸움과 연결되어 살펴본다면,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사람의 손이 영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 중에 그리스도인에 대해 전반적으로 친절하고 너그러운 이들이 많다. 그러나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관심사들을 대적한다.

그들의 관심사는 전적으로 세상적이요, 절대적으로 천상적이지 않다. 그리스도를 향해서 세상이 보인 태도는 어때했는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적대적이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정치가들과 일반 백성들, 로마 군병들과 심지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까지 - 그들을 예배자로 변화시키는 은혜의 이적이 일어나기까지 - 그를 혐오했다. 그리스도를 닮아갈수록 세상에 적대적인 자세와 박해를 더 경험하게 되는 법이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