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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213] 본문

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213]

En Hakkore 2024. 7. 27. 15:14

잘못을 범한 형제를 돕는 일(마 7:5)

그러므로 마태복음 7장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훈에는 레위기 19:17과 반대되는 것이 조금도 없으며, 오히려 빛을 던져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형제에게 권고하는 행위를 금하신 것이 아니라 그릇된 방법으로 그것을 행하는 것을 금하신 것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라는 구절에서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적당한 때의 한 뜸에 해당한다" 라는 옛 말이 실제로 입증될 것 같은 사람의 경우에 우리가 참으로 도움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가 꼭 따라야 할 과정을 공표하고 계신다.

즉 사람의 잘못을 고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은 더욱더 무거운 죄를 범하는 데에서 그를 구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른 사람의 눈에서 티를 제거해 주는 일은 어떤 서투른 손으로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손은 다른 사람의 눈을 자극하여 더 나쁘게 할 것이다.

먼저, 이 경우에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형용사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하다. 3,4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경우를 되돌아보면 거기에서는 우리 모두가 흔히 범하기 쉬운, 경솔하게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이 악한 습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대들보에는 무관심한 반면에 자기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불친절한 눈으로 계속해서 바라보는 행위, 즉 자기 자신은 더욱 무거운 죄를 범하는 반면에 자기 형제에게 있는 작은 잘못을 고쳐 주고자 하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거룩하신 우리 주님께서 그와 같은 비열한 사람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 즉 배우와 같은 자요, 거룩의 요구에 대해서 매우 열심이 있는 체하는 반면에 자기 자신은 그것의 분명한 명령을 어기고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타협할 줄 모르는 성실성은 그것을 부드럽게 표현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러나 그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3)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나, 그의 두 제자에게 '미련한 자들'(눅 24:25) 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중생하지 아니한 자에게 말씀한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이 말씀이 중생하지 아니한 자에게만 적용된다는 근거는 없다.

만일 우리 주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신 대상이 중생하지 않은 영혼이라면 그가 비난하셨던 자를 가리켜 '형제'라고 하시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는 그가 여전히 죄와 허물 가운데에서 죽어 있는 자로 하여금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도록" 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시는 수고를 하고 계신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그와 같은 행동을 싫어하시는 것을 나타내고, 그러한 행동을 그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에게는 지극히 관대히기 쉬운 행동의 위험성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은 고쳐 주고자 할지라도 자기는 자신을 엄하게 비판하지 못하는 이 부주의한 신자를 '외식하는 자' 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입증되고 있다.

배우처럼 연극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일이며, 하나님과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에는 충실치 못한 반면 우리 형제의 이해관계에 대해 충실한 후견인처럼 행동할 때에 우리는 바로 이러한 종류의 죄과를 범하는 것이다.

위선의 반대가 되는 정직과 성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지극히 기뻐하시는 일이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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