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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215] 본문
잘못을 범한 형제를 돕는 일 (마 7:5)
우리는 자발적으로나 고의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가 여전히 사랑하고 소중히 아끼는 것을 물리치지 못할 것이 분명하므로, 우리의 정욕과 죄로 물든 마음이 감화를 받아서 그것들을 슬퍼하고 미워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그 반대의 상태는 영혼의 두려운 죽음과 죄 가운데에서의 방심인데, 그 죄 가운데에서의 방심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면, 분명히 그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지극히 두려운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사실에 대한 증거는 대홍수 이전의 사람들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은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다"(마 24:39)고 말씀하셨다.
즉 그들은 자기들의 육욕과 광기를 의식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으며 자기들의 사악함을 방심한 채로 내버려 두었다.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에도 이와 똑같은 상태가 퍼져 있었는데,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그 가운데에서 방심한 채로 그냥 있는 것을 탄식하였다.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렘 8:6).
죄를 범하고도 그 죄로 말미암아 낮아지고자 하지 않으며 오히려 무관심한 것은 참으로 심각하고 치명적인 일이다. 죄를 마음에 새기고 슬퍼함으로써 그 죄들을 용서받고 그것을 추방해야만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명시해야 할 것이 있는데, 흔히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에 들어 있는 '들보'가 되는 것들을 한두 가지 언급해 보겠다.
첫째로, 그리스도인들의 '들보' 가 되는 것은 위선인데 그것이 마음을 지배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영적인 모든 성장과 열매를 방해한다.♡
그리스도인이 이 나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죄과를 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범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보다도 사람들을 더 기쁘게 하려고 하는 경우이며, 즉 우리가 두 번째 돌판의 율법보다 첫 번째 돌판의 율법이 외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더욱 열심히 실행하려고 하는 경우이다(그리스도께서 눅 18:20에서 부유한 젊은 관원에게 둘째 돌판의 계명을 어떻게 강조하시는가 주목하라).
또한 이것은 우리가 마음의 의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보다도 외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 더욱 관심을 갖는 경우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또 하나의 커다란 '들보'는 영적인 교만인데, 그것은 또한 우리가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이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게 만족케 하고 자신감을 갖게 하며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은혜의 건강을 방해하는 내적인 독이며, 또한 바로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특징이었다(계 3:17).
끝으로, 저지되지도 않고 극복되지도 않는 가장 저지르기 쉬운 어떤 특별한 죄나 욕망은 오히려 '들보' 의 구실을 하며, 실제로 우리의 판단력을 가려 버린다.
이 범위에서 답변해야 할 필요가 있는 중요하고도 실제적인 질문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압박하는 이 '들보'의 무게를 깨닫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정을 따라야만 하는가이다.
그 과정은 분명하게, 우리가 우리의 죄를 가볍게 생각하고 우리가 저지르는 천성적인 잘못을 단순히 '티' 정도로 경시하는, 우리 속에 있는 그러한 성질을 좌절시키는 데서 생기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에서 죄와 잘못들을 충실하게 시험해 봄으로써 행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범한 죄와 아담의 원죄를 더욱 자세하게 비교해야만 한다. 행동 면에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따 먹은 것 보다도 더 사악한 일들을 우리 마음과 생활에서 허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죄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뿐 아니라 그의 모든 자손들까지도 죽게 하였다. 만일 우리가 죄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골고다의 빛 가운데서 그것들을 비추어 보아야 하며, 그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치러야만 했던 그 두려운 대가를 알아야만 한다.
끝으로, 우리는 지옥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죄과와 그 극악함을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죄로 인해서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은 영원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지극히 무겁다는 것과, 거룩하신 이가 보시기에 그 죄가 지극히 극악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이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9, 10)라고 참으로 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슬퍼하며 하나님께서 그 죄들을 용서해 주실 것을 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즉 우리는 반드시 우리 안에서 죄가 점점 약해지도록 싸우면서 그 죄들을 중지시키려고 노력해야만 하며, 우리의 사악한 길을 변경해야만 한다.♡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이다(잠 28:13). 바꾸어 말한다면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라는 말씀을 인용해 볼 수 있겠다.
만일 내가 나의 눈에서 들보를 빼어 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눈에서 티를 뺄 수가 있겠는가? 또한 만일 내가 정욕을 물리치지 못하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나는 나의 형제가 범한 죄를 비난할 수 있는 자격이 전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시 51:10, 13),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Arthur W. Pink 산상수훈 p379
¤ 누가복음 18장 20절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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