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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212]

En Hakkore 2024. 7. 27. 15:13

잘못을 범한 형제를 돕는 일(마 7:5)

19세기 말의 많은 목사의 '성경교사'들이 범한 지극히 큰 실수들 중의 하나는,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 앞에 지금도 만연되어 있는 끔찍한 결과이다.

그것은 바로,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지 못한 율법의 엄격한 제도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그 가혹한 제도를 폐기하고 한층 더 관대한 시대(경륜)를 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하는 그들의 관념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려" 이곳에 오셨다(사 42:21). 그 율법은 변명이나 수정도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며 신령하기" 때문이다(롬 7:12, 14).

율법의 대강령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그것이다. 그리고 도덕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은 복음의 계율 속에 강조되어 있다.

모세 시대와 그리스도의 시대 사이에 있는 커다란 차이점은 우리 앞에 제시된 행동의 규율에 어떠한 변화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지금 그 규칙을 강조함으로써 생기는 더욱 효과적인 동기와 지금 부여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중생하지 아니하였으며, 그러므로 율법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였던" 것이다(롬 8:3).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능력' 의 영(딤후 1:6)과 율법을 즐거워하는 거룩한 본성을 얻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레 19:17).

이 말씀의 대의는 이 연약한 세대의 감상과 참으로 다르다. 오늘날에는 거룩의 기준과 자기 형제들에 대하여 성실하게 되기를 추구하는 자를 대개 '사랑이 부족한 자' 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영적인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는 자이다. 영적인 사랑은 병약한 감상이 아니라 거룩한 원리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의 자녀들에게 매가 필요할 때에 그들에게 매를 사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게 된다.

자녀들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허락해 주며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 그들을 결코 벌하지 않는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하는 부모는 자기 자식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이다.

반면에 참으로 그들의 유익을 구하며 자기의 감정을 제쳐두고 필요할 때에는 육체의 벌을 가하는 부모는 최고의 사랑을 입증하는 부모이다.

진실한 사랑은 성실하며, 자기 자신의 관심과 감정을 없애고 항상 그 사랑의 대상의 안녕(행복)을 증진시키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형제들의 사이는 항상 그와 같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계율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형제의 잘못을 무시하고, 그와 같은 길을 수정하기를 구하는 그 유쾌하지 않는 의무를 이행하려 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 레위기 19:17에서 분명하게 암시해 주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일종의 미움이다.

왜냐하면 바른 것과 그런 것 사이에 어떠한 제3의 선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과 미움 사이에도 제3의 성질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마음속 깊이 내 형제의 안녕을 참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사랑은 그의 죄를 눈 감아 주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죄로부터 그를 구하여 주고자 하는 마음을 요구할 것이다.

즉 그의 창문에서 한 줄기 연기가 새어 나오는 것을 처음 발견하였을 때에 그에게 불이 난 것을 경고해 주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경보를 울리지 않고 그의 집이 반쯤 타 버릴 때까지 기다려야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레위기 19:17의 끝 부분에서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담당하지 않도록" 행동을 취하라고 암시해 주는 바와 같이 나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의 죄를 무시하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 그 사람의 죄에 같이 참여한 자가 되는 것이다(딤전 5:22).

Arthur W. Pink 산상수훈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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