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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143] 본문
성한 눈 1(마 6: 22-23)
매튜 헨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눈, 그것은 즉 마음이다. 만일 그것이 성하다면 이는 자유롭고 관대하다는(bountiful) 의미로, 그 말은 로마서 12:8; 고린도후서 8: 2-9, 11, 13; 야고보서 1:5에서 자주 나오고 있다.
그리고 '선한 눈' [bountiful eye 관대한 눈](잠 22:9)이란 말씀도 보여진다. 만일 마음을 관대하게 품고 그 중심을 선행과 자선에 쏟는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행실로 이끌어 질 것이다.
모든 행위는 '밝을 것이요,' 참된 기독교 정신, 즉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 없는 경건(약 1:27)의 실례이며 증거가 될 것이다. '밝을 것'(full of light), 혹은 좋은 사역은 사람 앞에서 비추는 우리의 빛이다.
그러나 만일 마음이 '나쁘면'. 곧 탐욕스럽고 무정하고 시기심 많으며 괴롭히기 잘하고 인색하면(이러한 마음의 기질은 종종 나쁜 눈으로 표현되고 있다. - 마태복음 20:15; 막 7:22; 잠언 23:6,7),
몸은 '어두울 것이니'. 모든 대화가 이교족이며 비기독교적으로 될 것이다 인색한 자의 도구는 항상 '악하다'. 그러나 관대한(liberal, 존귀한 자) 일을 도모한다.(사 32:5-8)," 이러한 해석은 직접적으로도 문맥과 잘 일치된다.
이 책 제 28장의 도입 부분에서 지적했던 대로 산상설교의 이 다섯 번째(6:19) 부터 6장 끝까지 이어지는)에서 그리스도의 의도는 그의 나라의 성격에 대한 유대인들의 그릇된 견해를 바로잡는 것, 그리고 설교를 듣는 자들의 마음을 탐욕스러운 정신으로부터 전환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여러 가지 수긍할 만한 이유들에서였다. 우리가 가장 큰 보물로 여기는 것에 우리의 품성도 따라감을 그들에게 경고하셨으며, 이제 그리스도는 보물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분별력은 우리의 눈, 혹은 목표의 성한 상태에 따라 결정될 것임을 암시하신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에 대해 약간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우리 구절의 범위에 대해 너무나 한정적임이 드러난다. '눈'은 여기에서 '온 몸'의 빛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관대한 마음은 우리의 모든 감정과 행동의 조정자가 아니며, 그것은 다만 자비롭고 풍성한 일들을 조절할 뿐이다.
매튜 헨리의 언급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눈, 그것은 즉 식별력이다. 실제적인 판단, 양심은 눈이 몸에 대해서 하듯 영혼의 다른 능력들에 대해 가능하며 그 활동을 이끌고 지시한다.
이제 만일 눈이 참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면, 특히 보물을 쌓아 두는 중요한 일에 있어 올바른 선택을 위해 다른 사물들을 분별한다면, 눈은 감정과 행동을 바르게 인도할 것이요 모든 것은 은혜와 위로로 밝아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눈이 '나쁘면,' 탁해지고 그리고 저열한 능력들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에 의해 이끌리고 매수되고 편견을 갖게 된다면, 즉 만일 눈이 그릇되고 오해하게 된다면, 마음과 생활은 틀림없이 '어두울 것'이며 모든 행위는 타락할 것이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할 것이다(시 82:5). 그것은 '하나님의 촛불' 이어야 하는 인간의 영혼이 도깨비같이 된 때이며,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케 하여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 때(사 9:16)라고 말해진다.
실제적인 판단에 있어 실수는 치명적인 것이다. 즉 그것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는(사 5:20) 그 상태이다. 그러므로 사물을 바르게 이해하고 우리 눈에 안약을 발라 깨끗이 하는 일에 우리는 관심을 갖는 것이다."♡
비록 '눈'과 '성한' 눈 사이의 어떠한 뚜렷한 구분을 묘사하지 않는데서 명료성을 결여하고 있긴 하지만 이 해석은 좀 더 만족할 만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식별력이야말로 건전한 사람이 모든 활동을 하는 데 있어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더 지시권을 갖는 영혼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믿는 그대로 자신이 살아가는 방법이 크게 결정되어지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여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 이와 같은 해석은 우리가 본문 바로 앞 절과 본문 바로 다음 절에서 갖는 차이를 좀 더 명확하게 구별짓는다.
21절 말씀에서는 '마음'은 주로(비록 절대적으로는 아니지만) 감정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감정이야말로 우리리의 '보물'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4절(하나님과 재물에 대한 섬김)에서 근본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의지이다. 그러므로 21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각각 감정과 식별력, 그리고 의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것들이 함께 속사람을 구성한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264
Tip
(로마서 12장 8절)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8장 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
(야고보서 1장 6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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