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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118] 본문

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118]

En Hakkore 2024. 7. 16. 10:52

기도 2(마 6:14, 15)

이제 긍정적인 면을 다루어 보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이 엄숙한 말씀은 제자에 대한 엄격한 시험이 된다. 그 시험에서는, 자기를 해친 자를 용서하지 않고 원한과 복수심을 품는 신앙 고백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에서 제외시킨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자기의 교만이 진실로 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심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용서를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만이 깨어지면 우리는 기꺼이 다른 이를 용서할 수 있게 되며, 우리 자신도 하나님에게서 적절히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랑에 찬 친절을 미미하나마 다른 이에게 베풀 수 있을 때 기뻐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게 되려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해야만 한다(딤전 2:8).

첫째로,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속적인 용서를 받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며 필요한 자격이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려니와."

이 두 가지 사실은 뚜렷이 결합되어져 있으므로 우리가 그것을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항상 우리의 회개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용서는 우리의 회개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회개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을 뿐이다.

우리가 우리를 해친 다른 이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만한 도덕적인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과실을 범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동안에는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할 때 우리도 하나님의 자비를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의 위안을 기대할 수 없으리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말씀의 뜻을 제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가 앙심 깊은 원한에 빠져 있는 한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한다는 것은 뻔뻔스럽다는 말이다.

둘째로,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의 표시이다.

우리는 본래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하는 자"(딛 3:3)의 상태에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은혜로써 구속자의 신성한 정신을 다 닮는다면 우리도 구속자와 같이(눅 23장) 우리의 적을 위하여 기도하게 될 것이다.

주의 사랑하는 제자는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딤전 1:16)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의 마음속에서 기적을 일으키면 자비로움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결과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룬 화해는 우리가 동료에게 베푸는 위로하는 정신에 의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온화하게 해주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다른 이를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대할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자비를 입은 사람들이야말로 다른 이를 가장 온유하게 대할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부드럽게 대해 주셨는지 알기 때문이다"(토머스 맨튼).

셋째로,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는 것을 결합시켜 놓은 것은 이것이 용서를 입은 사람들에게 부과된 의무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필요성을 강조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청할 때마다 매우 중대한 이 의무를 상기해야만 하며,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 의무에 대하여 맹세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고 기도할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고 덧붙이도록 요청받는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 쪽에서 수행해야 할 의무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형식적인 약속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진지한 요청을 할 때 우리는 그에 부합하는 의무에 대해서도 맹세해야만 한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에는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한 수고를 할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할 때에는 우리도 다른 이에게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넷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를 확신하도록 고취시켜 주는 말이다. 복수라는 고쳐지지 않는 낡은 습관을 우리 안에 여전히 남겨 놓아 둔 우리는 성령의 불꽃을 받음으로써 우리를 해친 사람을 용서할 준비가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을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눅 11:4)라는 말씀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자비를 거의 지니고 있지 않은 우리가 관대함을 베푸는 일이 가능한 일이라면, 하물며 모든 은혜를 가지신 하나님이시니 이 세상의 피조물에게 얼마나 넘치도록 베푸시겠는가!

그리스도께서도 그와 비슷한 종류의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타락한 인간도 연약하고 궁핍한 자식에게 사랑으로 대할진대 자비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에 무관심할 리가 있겠는가!

Arthur W. Pink 산상수훈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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