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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48]

En Hakkore 2024. 7. 12. 10:44

율법과 살인 1(마 5: 21-26)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2절).

마태복음 5장 가운데 결코 가장 쉽게 해석될 수 있는 절이 아니다. 주석자들도 이 구절의 세목의 해석에 있어서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일반적인 의미는 명백하다.

주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권위 있는 말로 랍비들의 부질없는 생각을 걷어치우고 그의 청중 앞에 장엄하고 신성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설명하고 여섯 번째 계명의 진정한 해석을 제시하셨다.

비록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들었다 하더라도(그들에게서든, 옛 사람들에게서든) 그것은 하나님의 엄한 계율을 벗어난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다.

아버지의 영광과 영혼의 유익을 추구하는,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인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실제 살인 행위를 저지르기에 족한 미움에도 세 등급이 있다. 그들 또한 여섯 번째의 계명을 어긴 자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리라.

첫째,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에서 형제란 유대인 사이의 다른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우리에겐 동료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로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모든 사람은 한 형제로 창조되었으므로 모든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무라시는 것은 단순한 노여움만이 아니라 부당하고 무절제한 노여움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모범과(막 3:5) 사도적 계율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엡 4:26)에서 볼 수 있는바와 같이 거룩한 분노도 있는 것이다.

경건한 분노와 부당한 노여움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경건한 분노란 사랑이나 의에서 출발하여 상대편을 선으로 이끌게 함을 목표로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는 반면, 부당한 노여움이란 자만으로 출발하여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어한다.

노여움이란 죄악에 대항하여 불타 오를 때만 정당하며,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열정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섯 계명을 해석할 때 부당한 노여움을 첫 번째로 꼽으시면서 그 뜻의 일반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죄를 금한다 하실 때는 어떤 원인에 의한 죄든 같은 종류의 죄 또한 금하시고 계시며, 특히 대부분의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특별한 분노를  금하신다는 뜻이다.

부당하고 무절제한 노여움은 신의 벌을 받을 만한 십계명의 파괴에 해당하므로 이 방자한 감정이 폭발하여 은혜의 기회를 놓치게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부지런하고 꾸준하게 우리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이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무절제한 노여움을 금하고 있는 이 계명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인내와 자비로써 매일 우리를 대하시고 계시므로 우리도 우리의 형제에게 그러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자주 상기하여야 한다(엡 4:31, 32)

여기에서 정죄하고 있는 두번째 죄는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또는 무익한 녀석이라 하는" 자이다. 여기에서 금하고 있는 것은 자제되지 않은 기질로부터 나온 경멸적인 조소이다.

여섯 번째 계명에서는 모든 욕지거리와 약한 마음에서 나온 악의 있는 표현은 금한다. 매튜 헨리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악의 있는 비방과 비평은 모두 '그 입술 아래에 있는 독사의 독'(시 140:3)으로서 은밀하게 그리고 서서히 죽어간다" 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성령은 이스마엘이 이삭에게 한 야유를 "박해" (갈 4:29)라 칭하셨고, 모든 잔혹한 말 또는 그런 식으로 부르셨다. 뿐만 아니라 그 금지는 우리의 몸짓, 냉소나 머리 흔드는 행위에까지도(마 27:29) 적용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격정적인 언어뿐만 아니라 몸짓과 눈의 움직임(창 4:6)까지도 신경을 쓰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세 번째 등급의 살인은 우리의 형제를 비방하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누가복음 24:25과 고린도전서 15:36에서 명백히 알 수 있듯이 우리를 정죄하는 것은 단순히 한 마디의 욕설을 사용하는 것 그 자체는 아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 한 자비로운 열망은 좋은 일이지만, 절제할 수 없는 분노로 어리석음을 비방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미련한 놈'이란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거스른 반역자, 즉 배교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친구를 지옥 갈 자로 선고받은 녀석이라고 욕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민수기 20:10에서 모세가(복수 형태로) 사용한 바로 그 말이며 그 이유는 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반역자들' 이라 칭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음을 관철할 수 있다. 몇 번 그들에게 반항적이라고 나무랐을 따름이다.

나머지 한 경우를 살펴보자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정도의 형벌에 대해 언급하시는 가운데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형벌을 가하기 위해 자주 열었던 여러 가지 법정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며, 나아가서 주님께서 정죄한 죄를 범한 죄인들에게 내리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암시하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손하고, 마음속에 사리고 있는 살인하고 싶은 감정을 고백하며, 말과 행동의 잘못을 회개하는 것 외에는 이러한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길이 없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통해 주님의 용서를 비는 것 외에는 달리 저주를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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