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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44]

En Hakkore 2024. 7. 11. 11:32

그리스도와 율법 3(마 5:17-20)

여섯째로, 이 의는 어떠한 점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가?

그리스도인의 의의 우월성은 이미 자세하게 설명하였으나 그것과 관련해서 두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사랑과 믿음에서 나오지만, 반면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불신앙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지만(벧후 1:4) 그들의 의는 전체가 인간의 성품이다.

그리스도인의 의의 결점은 그리스도의 무한한 공로로 말미암아 감추어지지만 그들의 의의 결점은 하나님께 칭찬을 얻을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새 언약의 조건에 따른 복음적 의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시내 산의 계약 안에는 지존자께서 율법적인 의를 받아들이신다는 조항이 없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오히려 그들을 그곳에서 쫓아낼 것이다.

일곱째로, 우리주님께서 이 의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내리신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는 판결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19절에 대한 주석의 내용에서 우리는 이 '천국'이라는 표현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보다 더 넓은 범위를 나타내며 신앙고백의 영역, 곧 기독교 사회 전체를 포함한다고 지적하였다.

즉, 이것은 진실된 자뿐 아니라 거짓된 자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의미가 '대단히 많을 경우' 에 적용된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 의미를 조심스럽게 제한하였다.

한두 가지 현저한 예외가 있는데, 예를 들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 이 말씀에서 천국은 영광의 나라라고 언급해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구절도 그와 같은 경우인데 즉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의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며 오직 그 의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해 줄 것이다.

여덟째, 지금 이 구절과 그 문맥과는 어떻게 관련이 있는가?

이 구절 전체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복음사역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논박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주님께서 그 시대의 종교적 지도자들과 독립적으로 활동하셨고 '장로들의 유전' 을 무시하셨으며 나사렛의 공회에서 은혜를 선포하셨기 때문에(눅 4:16-22) 많은 사람들이 그를 모세를 반대하는 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상 그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행해지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낫고 새로운 어떤 것을 가져오시기 위해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과 유대교 사이에는 실제로 아무런 모순이 없었다.

즉 부수적인 것들은 서로 많은 것이 달랐을지라도 근본적인 것들은 사실상 서로 완전하게 일치하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오늘날은 그 두 가지 섭리의 영적인 통일성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지나치게 유연하게 된 대부분의 '성경고사' 들에 의해 강력하게 거절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완전하게 하려' 오셨다고 분명하게 그리고 강조하여 말씀하셨다(17절).

즉 우리는 지금 그가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행하고 가르침으로써 율법의 완전성을 보존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셨으며(19절),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다.

넷째, 그는 모세와 반대가 되기는커녕 도리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하는 의를 그의 제자들에게 요구하셨다. 그 후로는 그의 청중들 중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를 의심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20절에 나타난 우리 주님의 뜻을 분명하게 깨닫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 되는 조건에 대해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그것을 이미 소유한 자들의 특성에 대해서 설명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주님의 주변에 모여든 군중들의 대부분은 틀림없이 그들의 욕망대로 할 수 있는 한 더 큰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이것이 가련한 인간 본성이다).

그런데 주님의 왕국의 진실한 백성들을 구별하는 도덕성과 영성이 서기관들이 가르치고 바리새인들이 예시하였던 것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실로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제자의 의가 그들의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어느 누구라도 그를 자기의 제자라고 생각지 아니하였다. 이와 같이 그의 나라의 본질과 요구는 그가 율법을 존귀케 하고 보존하셨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이 구절과 전후 문맥상의 관계와 관련해서, 우리는 산상설교 전체를 통한 그리스도의 주된 의도 중 하나가 그의 청중들로 하여금 거룩하신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 의의 깊은 필요성을 느끼도륵 일깨우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바리새주의를 번성하게 만든 것은 율법에 대한 무지였는데, 그들은 외적으로 문자적인 면에서만 그것을 완전하게 하기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그것의 참된 의미와 요구를 강조하심으로써 양심을 일깨우고자 하셨다.

이 산상설교는 하나의 주된 사상을 중심으로 계속 반복되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불행을 깨닫게 해주고 그들을 하나님의 의 안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은 오직 영적으로 율법을 적용시키고 또한 율법의 침범할 수 없는 요구를 방조하심으로써만 이룰 수 있으며, 오직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복음을 알고 깨달을 수 있는 준비바 되는 것이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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