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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16] 본문

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16]

En Hakkore 2024. 7. 9. 11:29

팔복 3(마 5 : 3-12)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우리의 인류와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귀중한 성품이다. 그것은 고통을 받는 자의 고난을 슬퍼하는 애정과 호의의 마음으로, 우리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운다.

긍휼은 그 소유자를 품위 있게 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비로 공의를 누구러뜨리도록 하며 복수의 마음을 가라앉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의 요구를 비웃으며, 많은 사람들이 받아 마땅한 비참한 상태의 사람들을 동정하는 어리석은 감상벽과는 현저하게 다른 거룩한 기질이다.♡

어리석은 동정심은 극악무도한 범죄자에게 판결이 내려진, 공정하고 충분히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선고를 취소하거나 수정하게 할 능력을 간구하는 거짓되고 불경건한 긍휼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다(유 22절).

그런데 사울 왕은 아각을 살려 주었을 때, 이 원칙을 무시하였다. 또한 긍휼은, 어떤 사람에게는 관대하게 대하며 다른 사람에게는 과격하게 대하는 불공평을 반대하는 것으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이와 같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자연인의 마음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에게도 때때로 많은 친절한 성품과 고난에 대한 동정심과 그들에게 잘못을 범했던 자들을 용서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본능적인 것일 뿐이며, 비록 그들이 친절하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지도 아니하며 때때로 하나님의 율법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가르치시며 권하시는 것은 자연적인 친절과는 대단히 다르며 그보다는 훨씬 더 뛰어난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같은 것으로, 그의 성령의 열매이며 그의 말씀으로 명하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이다. 그리스도께서 긍휼히 여기셨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는 자와 함께 우셨는가? 그리스도께서 어리석은 자의 소행을 참으셨는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재하신다면, 비록 불완전하게 나타날지라도 틀림없이 똑같은 기질이 드러나게 된다. 이와 같은 긍휼은 느끼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다. 곧 그것은 행동하는 원리이다.

그것은 마음을 움직이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손을 움직여 궁핍한 자를 돕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서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긍휼은 우물을 막거나 샘을 메워 버리기는커녕, 오히려 선행의 풍부한 원천이 되어 거기에서부터 축복이 시작된다.♡

그것은 무익한 말에 의해 그 자체가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행위를 수반하는 것이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요일 3:17).

즉 가련한 처지에 있는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모든 긍휼의 행동은 내부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 구절에서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긍휼은 마음속에 널리 퍼져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열매로서 선한 일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긍휼은 육체를 따라 행함으로 말미암아 잠시 동안 억제되고 저지되지만, 그가 그리스도인의 성품의 일반적인 경향과 그의 생활의 주변 성향을 따르게 될 때 그 긍휼은 새로운 사람의 명백한 특징으로 나타나게 됨을 알 수 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시 37:21).

아브라함이 그의 조카 롯에 의해 손해를 입은 후에도, 그에게 롯의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게 하며 확실하게 하도록 한 것은 아브라함에게 있는 '긍휼' 이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로부터 그렇게 가혹하게 학대를 받은 후에도, 그들을 아낌없이 용서해 주도록 감동을 주었던 것은 요셉에게 있는 "긍휼' 이었다.

미리암이 모세를 적대하였으며 주께서 문둥병으로 그녀를 치신 후에도 그에게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민 12:13)라고 부르짖도록 감동을 주었던 것도 모세에게 있는 '긍휼'이었다.

사악한 사울이 다윗의 손에 붙여졌을 때 그의 대적을 목숨을 살려 주도록 한 것도 다윗에게 있는 '긍휼'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한다(시 109:16)라고 예언되었음을 볼 수 있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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