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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8]

En Hakkore 2024. 7. 9. 10:52

팔복1(마 5:3~12)

'애통'은 죄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부드러운 양심과 상처받은 마음으로부터 샘솟아난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반역하고 원수가 되었던 것에 대하여 경건하게 슬퍼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은 마음으로 믿고 의지해 왔던 도덕성에 대한 슬픔이기도 하며, 자기 과신의 원인이 되는 독선적인 태도에 대한 슬픔이기도 하다.

이러한 '애통'은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닫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볼 때 "그들이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슥 12:10).

그것은 '길르앗의 유향', 곧 복음의 위로를 진실하게 마음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러한 눈물과 탄식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영적 상태의 진실한 결핍에 대한 애통이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죄악에 대한 애통이기도 하다. 이러한 애통은 언제나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느끼는 마음과 같이 생겨난다.♡

그러나 '애통'은 결코 최초의 뉘우침과 회개를 체험하는 것으로 제한할 수는 없다. 동사의 시제를 주목해 보면, '애통하였던' 이 아니라 '애통하는', 즉 현재의 계속적인 체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자신은 애통해야 할 일이 훨씬 더 많이 있다. 그가 지금 저지르는 죄가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간에, 그에게는 매일의 슬픔이 되는데, 만일 그의 양심이 부드러운 상태에 있다면 마땅히 슬픔이었으며 슬픔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본성의 부패함과 마음속의 죄악과 마음속의 부패의 심연에 대한 각성, 즉 그가 항상 부패한 일을 행하고 있음을 깨닫게 됨으로써 그는 몹시 괴로워한다.

불신앙의 큰 파도, 자만심의 증가, 냉담한 그의 사랑, 신앙의 열매의 결핍을 깨달음으로써 그는 "나는 참으로 비참한 자다"라고 부르짖게 된다. 즉 지난날의 죄에 대해 겸손하게 뉘우치게 된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엡 2:11)

그렇다,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한다"(롬 8:23).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의 징계의 채찍을 받고 탄식하지 않겠는가. 즉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인다"(히 12:1).

그리고 그가 모든 사람들이 주 예수께 행하고 있는 심한 모독에 대해서 깊이 탄식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서 살면 살수록, 하나님을 모독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더욱더 애통할 것이다.

즉, 그는 다윗 왕처럼 말할 것이다.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로 말미암아 내가 맹력한 분노에 사로잡혔나이다"(시 119:53).

그리고 예레미야처럼 말할 것이다.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렘 13:17).

그러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왜냐하면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겔 9:4)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고통의 슬퍼하는, 동정심에서 우러나오는 애통이 있다. 즉,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그렇다면 이 말씀의 근본 사상으로 되돌아 보기로 하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은, 자신의 죄를 슬퍼하는 회개의 영혼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중요한 일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단지 애통하는 자였기 때문에 '복이 있는 자'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의를 받게 될 만큼 그렇게 애통하는 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계 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을 자랑으로 여기고, 자신의 내적 비참함에서 위로를 받으려고 한다.

참된 위로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것, 즉 자신의 수치를 인식함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이다.

가인의 경우에 분명히 나타난 것처럼 영혼의 고통은 언제나 복음에 의한 회개와 똑같은 것은 아니다(창 4:13).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 마음속에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을 갖게 하며, 성령께서 그를 거기에 버려 두시지 아니하시고, 죄에서 떠나 하나님의 어린 양께로 그를 인도하신다.

그때 그는 위로를 받게 된다. 복음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자들에게 자비가 있다고 약속했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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