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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7]

En Hakkore 2024. 7. 9. 10:51

팔복1(마 5:3~1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요"(4절).

애통이란 빈궁한 인간의 본성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고통과 슬픔으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은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것이다. 우리가 쾌적하고 즐거운 사회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 본문의 말씀은 중생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이상한 말로 들리겠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귀에는 달콤한 음악으로 들린다.

"만일 그들이 '복 있는 자'라면 어찌하여 '애통해' 하는가?" 그들이 애통해 한다면 어떻게 복이 될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의 자녀만이 이 역설을 설명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슬퍼하는 자가 행복한가"라는 말은 세상의 논리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어느 곳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부유한 자와 명랑한 자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를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분명히 모든 종류의 슬픔을 다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여러 본문에서 지적하는 영역에 속하지 못하는 애통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이와 같은 애통은 낙심과 재정적인 실패와 사랑하는 자가 죽었을 때 느끼는 슬픔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들 중 대다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책망을 듣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일을 '위로하신다'고 약속하신 일은 없다.

성경에 나타난 애통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방금 말한 것과 같은 자연적인 애통이며,

둘째는 죄로 말미암는 쓸쓸하고 서글픈 애통으로 유다의 애통처럼 절망적인 후회뿐인 슬픔이며,

셋째로는 은혜로 말미암은 애통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경건한 슬픔'이다

본문에서의 '애통'은 영적인 애통이다. 이 앞의 구절, 즉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구절은 분명히 여기에서의 생각과 일치한다.

그렇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재산이 부족한 자가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자다. 즉 자신은 본래부터 영적 파산자였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는 번민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다.♡

심령이 가난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오늘날 세상에 유행하는 라오디게아주의(Laodiceanism), 즉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자기도취를 반대하는 것이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도 영적인 슬픔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그 사실 속에서 영적 슬픔에 대한 더 많은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의 마음속에 은혜의 사역을 이루셨기 때문에, 그들은 복이 있는 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잃어버린 바 된 상태를 알고 느낄 수 있도록 깨우침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런 상태에 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즉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복이 있는 자'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첫째로 지적한 것은 진실로 회심하기 이전에 먼저 슬퍼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에서 구원받기를 바라기보다는 먼저 진실한 마음으로 죄를 뉘우쳐야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들은 그 사실에 대하여 결코 슬퍼해 본 적이 없다. 누가복음 7장의 여인을 보라. 그 여인은 그녀의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었다(눅 7:38).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는가?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를 보라.

그가 그 먼 나라를 출발하여 아버지께 돌아오기 전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18)라고 말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 이와 같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자를 찾아볼 수 있는가? 누가복음 18장에 있는 세리를 보라.

그가 어찌하여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하였는가?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죄악을 느꼈기 때문이다.

오순절 날 회심하였던 3천의 무리도 그렇게 느꼈다. 즉 그들은 "마음에 찔려 부르짖었다"(행 2:37).

Arthur W. Pink 산상수훈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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