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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odus 321] 본문

강해시리즈/출애굽기 강해 (Gleanings In Exodus)

[Exodus 321]

En Hakkore 2024. 7. 2. 10:41

금송아지 2(출애굽기 32:1-10)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1).

이 사건에 대한 열쇠는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된 스데반의 언급에서 발견된다. 거기 이르기를,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행 7:38-40
)고 한다.

모세가 오래도록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 그들로 하여금 안달이 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여호와에 대한 충성을 던져 버렸고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그분을 떠났던 것이었다.♡

위에서 말한 내용은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 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이 상황에 대한 이스라엘의 모세에 대한 언급에 의해 확증된다. 그들이 모세를 거룩한 구원자로 소유하기보다는, 그들의 안목은 하나님에 의하여 쓰임을 받는 인간 도구에게 편협하였다.

그들의 심령이 하나님과 결별한 백성은 언제나 이러하다. 그 후대에 배교자인 이스라엘이 다음과 같이 한 말과 비교해 보자.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삿 8:22).

여기 출애굽기 32장에서 그들은 인간 도구를 '이 모세' 라고 경멸적으로 언급함으로써, 그들을 위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봉사와 기도에 거의 감사하지 않았다.

현재 우리가 다루는 부분이 다음의 말씀에 바로 접해서 나오는 것은 그 이유가 없지 아니하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출 31:18).

그 돌판들 위에는 그 첫째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하셨으며, 그 둘째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출 20:3, 4)라고 하신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었다. 현재 우리가 다루는 부분은 이러한 십계명에 대한 고의적, 공적, 그리고 연합된 불순종이다.

인간은 반드시 어떤 목적이 있어야 하기에, 만일 그들이 진정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면 즉시 거짓된 것을 필요로 하게 된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사실은 모든 세대를 통해 영속되어졌다. 기독교의 세계는 결코 그 표준에 대한 어떤 예외도 보여주지 않았다.

어떤 이가 이르기를 "오호라!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그러했다. 인간의 마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갈망한다. 인간의 마음은 감각을 채우고, 그것을 만족시키는 것을 사랑한다. 오직 믿음만이 '보이지 않는 그분을 보면서 견딘다.' 그러함에도, 어느 세대에서나, 인간들은 거룩한 실체에 대한 인간의 모조품을 선뜻 세우고 또 거기에 의지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눈앞에 타락한 종교의 모조품들이 증가되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해 신성한 천상적인 실체로 알고 있는 그러한 것들을,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들이 인간적이며 세속적인 날조물로 변형시켰다.

보이지 않는 팔에 매달림, 보이지 않는 희생제물을 의지함, 보이지 않은 제사장에 의지하는 것, 보이지 않는 우두머리에 자신을 맡기는 일에 싫증이 나서, 이러한 것들을 '만드는 일' 을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대대로 이어, 교회는 손에 '새기는 도구'를 가지고 바쁘게 일하면서, 하나하나 새기고 그리고 본을 떴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가 보는 많은 것과 말씀 가운데서 읽은 것 사이에서('부어 만든 금송아지'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사이처럼) 유사성이 거의 없음을 상세히 인식할 수 있기까지"(C. H. M).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거짓 신들을 섬겨 왔으며(수 24:14), 그리고 그들 속에 있는 육신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은 단지 상징적으로 구원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 그들 중 대다수가 믿음이 없는 자녀들이었다(신 32:20) -

그러나 그들의 역사를 읽을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다"(고전 10:6).♥

게다가, 사도는 이것을 한꺼번에 덧붙이지 않고,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전 10:7)고 한다. 또 이르기를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전 10:14)고 말한다.

사도 요한(그의 편지는 그가 말할 수 있는 이들에게 보내진 것임)도 역시, "아버지와 그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는 자"들에게 가까이 권하여 이르기를 "자녀들아 너희로부터 우상을 멀리하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들이 이러한 엄숙하고 필수적인 경고에 주의하도록 해주시기를 바란다. 단 한 가지 보장과 대비책이 있다면 그것은 곧 지속적으로 그리스도께 사로잡히는 것뿐이다.♥

우리가 방금 다루는 것은, 우리가 느끼기에 더 말할 것을 덧붙여야만 한다고 판단하기 이전에, 엄청난 실천적 중대성을 가지고 있다. 그 모형적 그림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하기에 분명히 쉽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 산 위에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도 땅을 떠나 하나님 앞의 높은 곳에 계신다. 그러나 주님은 떠나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고 했다.

그분은 믿음의 목표이기에, 우리의 애정을 그분에게 두어야 하고, 나날이 그와 교제하면, 우상으로부터 우리의 심령을 지키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여호와로부터 돌아섰을 때 금송아지를 만드는 일이 즉시 뒤따라온 것이 정말 틀림이 없었듯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의 신앙고백의 역사 속에서) 그 처럼 사랑(계 2:4)을 버린 뒤에는 "사탄의 회당"(계 2:9)이 뒤이어 세워졌음이 틀림이 없었듯이, 오늘날도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떠난 마음은 모든 유의 가증한 우상 숭배를 향하여 그 문을 열어준다.

Arthur W. Pink 출애굽기 강해 p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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