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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odus 249] 본문

강해시리즈/출애굽기 강해 (Gleanings In Exodus)

[Exodus 249]

En Hakkore 2024. 6. 27. 10:49

성막의 문(출애굽기 26:36, 37)

2. 재료

"청색 자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짜서 성막 문을 위하여 휘장을 만들고"(출 26:36).

문을 위한 이러한 천의 직물은 막(the Cutains)과 휘장(the Veil)을 만든 것과 같은 직물이고 동일하게 좋은 품질이었다. 가늘게 꼰 베실이 기초 역할을 하였다.

이 지상에서 신성을 위한 진정한 처소가 제공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되었을 때뿐이었다. 그러나 지난 장에서 본 바와 같이, 성육신은 하나님이 아래의 인간에게로 왔을지라도 그 자체로는 인간들을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휘장이 갈라지기 위해서는 죽음이 들어와야만 했다. 여기 또한 성막의 입구에서도,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가늘게 곤 베실의 관련하여 우리의 주의를 끄는 첨가된 한 마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수 놓아 짜서" 라는 말이다. 이 말은 막이나 휘장과 연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고, 다만 바깥뜰의 출입문(출 27:16)에서와 대제사장의 띠(출 28:39)를 설명하면서 언급되었다.

우리가 여기서 덧붙일 수 있는 것은 히브리어의  '자수'(needlework)라는 말은 출애굽기 35:35에서 "수 놓는 일"로, 역대상 29:2과 에스겔 17:3에서는 "색깔의 화려함"으로, 시편 139편 15에서는 "기이하게 지음"으로 '끊임없이 변화를 줌'(minutely variegates) 으로 표기될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여기에서 다른 색깔들로 수놓고 고운 베실을 섞어 짠 방법에 우리의 주위를 집중하도록 암시하시는 것 같다.

3. 색깔(1)

'청색'(blue)은 하늘에 속한 자, 하나님으로 아들로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홍색'(scaret)은 인자를 언급하는데, 즉 그는 지난 날 고난을 당하셨으나 다가올 날에 땅에서 영광을 받으신 분이다.

'자색'(purple)은 독특하게도 그리스도의 왕권을 말할 뿐만 아니라, 그의 신성과 인성의 놀라운 연합을 가리키기도 한다. '청색. 자색. 홍색'의 언급은 성막의 부속품고 제사직에 연관하여 24번이나 반복되었지만, 단 한 번도 그 순서가 바뀌지 않는다.

이것은 그 배열과 연관된 중대한 진리와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이 사실에 대하여는 출판한 지 오래된 다른 책에서 너무도 아름답게 전달되었으므로, 가장 도움이 되는 해석을 아래에 자유롭게 인용한다.

"만일 우리들이 청색과 홍색을 다른 아무 색깔도 섞지 아니하고 나란히 놓아야 한다면, 그 강렬한 대조로 인하여 눈에 거슬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그 각각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그 자신의 영역에는 적절하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차이가 있기에, 그 색상에 있어 반대된다고 대체로 말할 수 있고, 직접 접촉하여 본다면 부조화될 정도이다.

중간에 끼어 있는 자색은 이러한 불유쾌한 작용을 구제한다. 눈은 쉽게 청색에서 홍색으로 옮아가는데, 이 같은 혼합된 색인 자색의 도움에 의하여, 역으로 된다.

청색은 점차적으로 그 반대색인 홍색에 흡수되며, 그리고 홍색의 화려함은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청색의 방향으로 부드러워진다. 자색은 이 두 가지가 섞여 형성된 새 색깔이다.
즉 그 특수한 아름다움은 양 색깔에 고루 힘입었기에, 그 들 중에 어느 한쪽의 비율이 약해지면, 그 특수한 성질을 상실하게 된다.

"홍색과 청색은 성막의 천의 모든 부분에서 결코 나란히 놓인 적이 없다. 이는 한 중대한 성격의 진리를 암시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성령이 이러한 배열을 끊임없이 고수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 예수를 공경하는 매우 소중한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는가? 그는 하나님이자 사람이기에, 우리는 복음서에서 완전한 사람으로서의 품위와 호감과 아울러 신성의 모든 충만함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외에도 그의 생각과 느낌, 방법, 말씀, 그리고 행위에서, 이 두가지의 불변의 혼합이 있다. ...그리스도를 묵상함에 있어, 이사야 9:6에 주어진 것처럼, 그의 이름의 첫 마디가 '기묘자' 임을 기억하는 것은 좋다.

또한 그렇게 놀라운 것은 그가 인간의 느낌과 애정과 함께, 하나님의 심오한 사상과 묘략을 자신 안에 함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복음서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신 세 가지 경우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야이로의 딸, 나인 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베다니의 나사로이다. 이들 모두는 주님의 전능한 권능의 완전한 표시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즉 첫 번째 경우는 죽음이 그 희생자를 바로 방금 엄습하였으며, 두 번째는 슬퍼하는 어머니가 그의 독자를 무덤으로 보내는 길에 있었으며, 세 번째는 주검을 이미 이전에 안치하여 무덤에서 썩기 시작하였다.

이들 각 장면들을 통하여 세 가지 색깔을 살펴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냄에 있어서 청색을 주저하지 않고 인정할 수 있는데, 그때 복되신 아들(주 예수님)은 슬픔에 잠긴 아버지의 간청으로,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그 집으로 갔다.

길을 가는 도중에, 소식이 전해지기를 "딸이 죽었으니,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할 이유가 있나요? 러고 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주님이 누구신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또는 주님을 곤경에 빠뜨리게 했던 그 곤란의 깊이(죽을 자를 살릴 목적)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육체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주님은 즉시 그 소녀의 아버지의 두려움을 잠잠하게 해 주었다.

그러므로 죽음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의 가슴에 평화를 명하면서, 하나님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을 하신 것이다! 다시 희망을 잃고 법석대는 자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이르시기를, '울지 말라. 소녀는 죽은 아니라 잔다' 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꾸짖으심을 비웃었다. 신자들은 이와 반대로 생각함이 옳지 않을까? 주님의 임재 가운데에서, 신자는 충분히 죽음을 비웃을 수 있다.

결국, 주님이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고 하셨을 때, 하늘에서 오신 이의 능력과 은혜가 알려진 바 되지 않았던가! 😎

Arthur W. Pink  출애굽기 p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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