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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odus 213] 본문

강해시리즈/출애굽기 강해 (Gleanings In Exodus)

[Exodus 213]

En Hakkore 2024. 6. 25. 11:29

속죄소(출애굽기 25:17-22)

3. 속죄소의 크기

성령이 우리에게 화목처의 크기를 허락하기를 기뻐하였던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몃 하나님의 말씀에는 의미 없는 것이나 사소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 길이는 2.5규빗이며 그 너비는 1.5규빗이었다. 그러나 그 두께네 대해서는 우리에게 언급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생략되도록 계획되었음은 시편 103:11에 제시해 주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 이르시기를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기록된 치수들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그 길이와 너비는 법궤의 치수와 꼭 같다. 그 치수는 하나님께서 그 구원의 은총을 위하여 설정하신 엄격한 한계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어떤 이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벏이는 바다와 같이 넓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확실하지만, '길이는 두 규빗 잔, 너비는 한 규빗 반'이라고 하신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의 자비는 자신을 깊이 뉘우치면서 지정된 속죄소에 자신을 드러내는 모든 죄인들을 포용하기에는 충분히 넚지만, 그 이상 확대되지는 않는다. 그 한계는 거룩하게 책정되었고 또 변개할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속죄소가 법궤보다 더 넓다고 가상적으로 상상하면서, 그리스도와 그의 대속의 죽음을 떠나서 하나님의 사랑에 의존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헛된 망상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고 하셨다. 주 예수의 구속하는 피를 떠나서는 그 어떠한 죄인도 은혜를 입을 수 없다.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사 45:21)고 하셨다. 구원의 은총은 그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공의의 요구를 채운 자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제공되지 아니한다.

오늘날 속죄소의 엄격히 한정된 치수에 저촉되는, 소위 말하는 복음주의가 많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정함을 입은 자의 구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즉 "그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RV 히 2:17)고 했다.

4. 속죄소의 장식품

이것은 위 양쪽 끝에 하나씩 날개를 펼친 두 개의 그룹들(cherubs)의 형상이었다. 그 날개를 속죄소 위에 펼쳐서, 그늘을 드리우면서 마치 하나님의 보좌를 보호하는 것 같았다.

그룹들의 모양과 관련해서 심각하고 중대한 의미가 있다는 것은, 속죄소에 대한 거룩한 말씀 가운데서 차지하는 그 탁월한 위치를 보아도 분명하다.

만일 연구자들이 출애애굽기 25:17-22을 읽어본다면, 그것에 대한 언급이 단수나 볷이든 간에 일곱 번 이상이나 기록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많은 것들이 그 주제에 대하여 기록되었으나, 우리는 그렇게 만족할 만한 것을 보지는 못했다.

성경에서 '그룹'(cherubim)에 대하여 맨 처음 언급한 곳은 창세기 3:24인데, 거기에 그들이 '불칼' 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모습이 있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법적 권세를 행사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음을 제시해 준다.

요한계시시록 4:6-8(겔 1:5-10과 비교)에 보면 그들이 하나님 보좌에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5:11-14에서, 그룹은 천상 피조물의 서열에서 가장 우위에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시편과ㅏ 에스겔에서, 그룹들은 사법적 행위(김판에 관한 하나님의 간섭)와 연관되어 우리에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이 여기 속죄소 위에 위치하는 것은 놀라운 의미를 부여해준다.

즞 하나님의 공의, 아니 죄에 대한 그의 진노가 그의 자비와 일치하여 한 조각품의 모습으로 보여진다! 하나님의 속성은 서로 대치되지 않는다. 빛과 사랑은 그의 본성의 양면에 불과하다!

두 개의 그룹들은, 속죄소 위에는 공동의 목적에 마음을 기울이면서, 흠모하는 모양으로 머리를 숙인 채 서로 얼굴을 맞보고 서있다. 그 숫자는 합법적인 증인에 대해 말한다. 그 주제는 여기에 개요만을 말하기에도 너무 방대하지만, 그러나 교회의 구속이 천사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됨을 성경에서 많이 암시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4:9에 보면 고난당하는 사도들이 "천사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표명한다. 에배소서 3:10에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베드로전서 1:11, 12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후에 뒤따랐던 영광은 "천서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고 소개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속죄소 위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두 구룹의 형상은,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의 전개 속에 있는 천사들의 계급에 대한 관심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추정한다.

Arthur W. Pink 출애굽기 강해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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