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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리즈/출애굽기 강해 (Gleanings In Exodus)

[Exodus 210]

En Hakkore 2024. 6. 25. 11:26

속죄소(출애굽기 25:17-22)

속죄소(시온좌)는 순수한 금으로 된 튼튼한 관 또는 두꺼운 널판이었다. 그것은 자체로 따로 분리된 별개의 물건이지만, 법궤의 뚜껑의 역할을 하였기에, '궤 위에' 얹어 둔 것이다.

"윗 가로 돌아가며 두른 금태"(꼭대기의 모서리를 구성함)는 그것을 유지하면서 미끄러지지 않게 한다. 속죄소는 그 속에 어떤 나무도 그 구성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법궤와는 달랐다.

성막의 기구들 가운데 순전히 금으로만 만들어진 다만 한 가지 물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등대로서, 크기가 무게에 있어서 더 작았다. 그러므로 속죄소는 그 본래의 가치로 따진다면 모든 거룩한 기구들 가운데 가장 값어치가 있었다. 이것은 속죄소가 예표했던 것이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해준다.

속죄소(the Mercy-seat), 또는 더 낫게 말해서 화목처(the Propitiatory)는 그 위에 뿌려진 화해의 피로부터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 길이와 너비는 법궤와 마찬가지로 2.5×1,5 규빗이었다. 양쪽 끝에는 그룹들이 있었는데, 그 위에 붙인 것이 아니라 속죄소를 만들 때 한 덩어리의 금으로 쳐서 만들어졌다.

이 상징적인 형태를 가진 그룹들은 그 날개들을 펴서 속죄소 위로 드리우고 있었으며, 그들의 얼굴은 그곳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 이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속죄소의 중요성
속죄소의 모형적 의미에 관해서 아주 다양한 해석이 우리에게 제공되고 있다. 어떤 필자들은 성경에 있는 사용법으로부터 그 정의를 구하는 대신에 히브리 어원을 강조하는 쪽으로 기울어짐에 따라서 올바른 방식에서 벗어났다.

다른 이들은 번제단과 속죄소가 저마다 예표하는 내용을 구별하는 데 실패하면서 혼란을 일으켰다. 속죄소에 대한 진정한 모형적 의미는 로마서 3:23, 25에서 거룩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흠정역(the Authorized Version)에서는 이것이 가려져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화목처가 더 나음)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화목 제물'(propitiation)로 표현된 헬라어는 히브리서 9:5에 '속죄소'(Mercy-seat)로 번역된 것과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로마서 3장은 하나님이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를 속죄소의 예표로 우리에게 소개한다고 선언한다.

만일 우리가 히브리어의 'kapporeth'를 속죄소로보다 '화목처(propitiatory)'로 표현했다면, 덜 모호하기 때문에, 그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신약성경에 의하여 첨가된 빛이 이러한 변화를 정당화 할뿐만 아니라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속죄소이지만, 그는 하나님께 드려진 화목(the propitiation) 덕택에 그렇게 된 것이다. 요한일서 2:2과 4:10의 헬라어(롬 3:25과는 다른 형태이지만)가 화목제물로 올바르게 번역된 것은, 이 구절에서 주 예수를 하나님의 공의의 법과에 대해 화해를 이룬 희생으로 언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서 3:25에 있는 칠십인역에서 언제나 'kapporeth' 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기에, 그 말은 히브리서 9:5에서 실제로 속죄소로 번역되었다. 화목처는 화목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장소는 아니지만, 그 대신 그 지속적인 가치가 하나님 앞에 증거되었던 그 장소이다.

너무도 많은 혼돈을 가져다주었던 것은 이 구분을 명확하게 하는 일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화목하다'(propitiate)는 동사는 달래다, 위로하다, 또는 만족하게 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화목처로 나타난 로마서 3:25을 읽을 때, 그 확실한 의미는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지금 그의 축복된 성자를, 화목을 이룩하신 자로서, 그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가라앉힌 자로서, 하나님의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킨 자로서, 신성한 모든 속성이 영화롭게 된 자로 증거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에 대한 화목제물'로서의 그리스도의 모형은 번제단 위에 있는 피 흐르는 희생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안식처, 또는 화목처로서의 그리스도의 모형은 휘장 속에 있는 속죄소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안식처가 되어, 그 안에서 주님의 모든 풍성한 은혜로 가련한 죄인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상에서 그에 의하여 화목제물이 드려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위대한 화목제물과 그것의 결과인 화목처는 이스라엘이 매해 드리는 속죄일의 의식에 의하여 둘 다 증거되었다. 이 사실은 우리를 위하여 레위기 6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 장에 기록된 가장 흥미 있고 중요한 내용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룰 수 없으나,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논제에 대하여 한 가지 견해를 제시해 주는 내용이 레위기 16:14에 있다.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쪽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라고 하셨다. 피(짐승의 죽음을 통하여 얻은 - 화목처 앞에 뿌려진 피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영구적 근거를 보장하였다).

단 한 번이면 하나님의 눈에는 족했지만, 속죄소 앞에서 일곱 번씩이나 뿌려질 정도로 은혜는 그런 경험을 겪었는데, 이는 우리(너무나 믿기에 더딘 심령을 가진 자들)에게 주님의 백성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그 영구적 근거의 온전함을 확신시키려는 것이다!  

Srthur W. Pink 출애굽기 강해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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