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Exodus 201] 본문

강해시리즈/출애굽기 강해 (Gleanings In Exodus)

[Exodus 201]

En Hakkore 2024. 6. 24. 12:10

법궤 1(출애굽기 25:10-16)

3. 법궤의 치수

법궤는 길이 2.5 규빗, 너비(폭) 1.5 규빗 그리고 높이 1,5 규빗이었다. 반복되는 절반(0.5)이 곧바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절반(half)에 대한 히브리어는 둘로 자름을 의미하는 어원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이는 이러한 반 규빗은 우리에게 현재 주어진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단지 부분적일뿐임을 암시한다고 지적하였는데, 이는 곧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고전 13:9)라는 말씀과 같다.

"그리스도에 대해 가장 충만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스바 여왕이 말한 것처럼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친히 본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 더 못되니'(왕상 10:7)라고 제일 먼저 말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모든 영광스러우신 주님이, 그 크기를 줄이시면서 -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 우리의 유한한 마음은 지식을 초월하는 기이한 충만함의 어떤 일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Mr. Samuel Ridout).

2.5는 5의 절반이며, 1.5는 3의 절반인데, 이러한 숫자들의 양자는 성경 가운데서 아주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후자를 먼저 생각해 보자. 3은 나타남의 숫자이니, 이로써 부활의 숫자가 되는 것은, 오직 부활에서 생명이 완전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동일한 이유로 3은 신성함(Deity)의 숫자이니, 이는 하나님은 거룩한 삼위의 세(3) 인격으로 충만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법궤의 너비와 높이(물체의 표시와 관련 있음)가 둘 다 3의 절반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법궤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말하고 그리고 3은 나타남의 숫자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충분하게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다는 암시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없지 않는가?

그렇게 그는 자신을 충분하게 나타내지 않았다. 다소의 사울처럼 사람이 맹인이 되었을 때 처럼(행 9:8), 요한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되었던 것처럼(계 1:17),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완전히 가리셨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친히 그를 볼 것이요" 또한 "감추었던 만나"를 먹을 것이니(계 2:17) 하나님을 찬양한다. 또한, 다른 숫자도 이와 같다.

5는 은혜를 의미하며, 그리고 법궤의 길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범위를 말한다. 그 길이는 영원하며 그리고 영원은 그 이전이나 그 이후 양자의 끝없는 기간이다.

그러므로 5의 절반은, 신자들이 현재 창세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은혜를 안다고 할지라도(딤후 1:9), 다가오는 수없는 세대는 여전히 그것이 미래에 드러날 것을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엡 2:7).

법궤의 높이와 너비를 동일하게 측정한 것은 곧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완전성과 독특성을 지적함을 언급하는 것이다. '너비'는 예수님이 인간을 다스리는 것을 말하며 '높이'는 하나님을 향한 주님의 관계를 말한다.

우리의 영적인 높이는 우리의 너비보다도 얼마나 짧은가? 예를 들자면, 우리는 하나님보다 우리 동료들을 불쾌하게 할까봐 얼마나 조심을 하는가! 완전하신 자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인간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의 요구를 안중에서 놓친 적이 결코 없었다.😎 나사로의 누이들의 호소에 응답하실 때, 주님에게 아버지의 영광이 그의 유일한 동기와 관심사였음을 주의하여 보라(요 11:4-6).

Arthur W. Pink 출애굽기 강해 p363

'강해시리즈 > 출애굽기 강해 (Gleanings In Exodu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odus 203]  (0) 2024.06.24
[Exodus 202]  (0) 2024.06.24
[Exodus 200]  (0) 2024.06.24
[Exodus 199]  (0) 2024.06.24
[Exodus 198]  (0) 2024.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