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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odus 150] 본문

강해시리즈/출애굽기 강해 (Gleanings In Exodus)

[Exodus 150]

En Hakkore 2024. 6. 21. 11:02

아말렉(출애굽기 17장).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본성은 아브라함의 생애에 의하여 예증되었다. 그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곧 이스마엘과 이삭이었다. 전자는 '육신으로 난 자'를 나타내며 후자는 '성령으로 난 자'를 나타낸다.

이스마엘은 자연의 일반적 질서에 의하여 태어났으나 이삭은 그렇지 않았다. 이삭은 기적에 의하여 태어났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초자연적으로 힘을 소생시켰는데, 그때 한 사람은 자식을 볼 나이가 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아이를 수태하기에 너무 늙었다.

먼저 태어난 이스마엘은 '계집 종'의 소생이었으나 이삭은 '자유하는 여자'의 소생이었다(갈 4:22). 그러나 이삭이 태어나 아브라함의 가족이 되자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창 21:9)고 함과 같이 다툼이 생겼다.

방금 말한 아브라함의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공상하거나 왜곡한 해석이 아님은 갈라디아서 4:29에서 언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은,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이 이제도 그러하도다"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본성은 이삭의 아들인 야곱의 생애에 의해서도 예증되었다. 야곱에게는 두 가지 이름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지상의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 이라 불렀다(창 32:28). 그때부터 야곱 이스라엘의 역사는 일련의 기이한 역설(paradoxes)을 보여준다. 그의 생애는 이중적 인간성을 나타내었다. 한때는 절대적 확신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나, 때로는 불신앙의 악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생애는 이중적 인간성을 나타내었다. 한때는 절대적 확신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나, 때로는 불신앙의 악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창세기 33~49장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성령께서 그 족장을 때때로 '야곱'으로, 다른 때는 '이스라엘' 로 부른 것을 보게 된다. '야곱' 은 마음속에 있는 옛 본성의 활동을 언급한 것이고, '이스라엘' 은 새로운 성품에 의한 열매가 입증된 때에 언급된다.

예를 들자면,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서 돌아가 그들의 아버지에게 그의 사랑하던 아들이 아직도 살아 지금 온 애굽 땅을 다스리고 있다고 전하자,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하더니"(창 45:26)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창 47:27, 28)라고 했다.

이 사람에 대하여 끝맺는 말을 살펴보는 것은 복이 된다.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그 수종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창 49:33, 50:2)라고 했는데 오직 보는 바와 같이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 은 미라로 만들었다! 죽을때에는 오직 새 본성만이 보존될 거것이다.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출 17:8).

창세기 21:25; 26:19, 20, 출 2:17, 민 20:19, 삿 5;11 등의 말씀이 비추어 보면 물(샘 등)의 소유권은 고대 사회에서 종종 분쟁의 대상이었는바, 르비딤이 반석으로부터 시내가 흐르게 되었다는 소식이 퍼진 것으로 인하여 아말렉이 그 소유물을 취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먼저 이스라엘을 처분해야겠다는 계획을 품었다. 향후 그들은 공격을 했다.

여기에서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의 대적의 정체이다. 그것은 아말렉이었다. 아말렉이라는 이름의 뜻은 '전쟁을 좋아함'을 의미하며 그 이름에 따라 "육체의 정욕을 따라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자"(벧전 2:11)들이었다.

"아말렉은 죽 한 그릇에 그 장자의 명분을 팔아 유업의 축복을 거절당한 에서의 손자'(창 36:12)이니 분명히 '옛 사람' 을 나타낸다"(F. W. G). 이 사실과 연관된 발람의 예언은 매우 놀랍다.

그는 예언하기를 "또 아말렉을 바라보며 예언하여 이르기를 아말렉은 민족들의 으뜸이나 그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민 24:20) 라고 하였다.

아말렉의 성격은 차후에 그에 대하여 모세가 말한 것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신 25:17, 18) - '육신' 이 곧 그러하다.

두 번째로 주의할 일은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습격한 시기이다. -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성령께서는 이 싸움이 일어난 때에 대하여 우리의 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이 나와 마시게 된 때였다. 그런 이후에 처음으로 이스라엘은 어떤 싸움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출 13:17과 대조를 이룸). 그들의 노예의 처지에 있던 건물에 있었을 때는 싸움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홍해에서도 여호와는 애굽인들과 싸우게 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바야흐로 성령을 예표한 그 무엇이 주어지자, 그들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렇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된 까닭은 성령을 예표한 그 무엇 때문이었다! 그 모형은 놀랍게도 정확하다.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본성의 참여자가 될 때(벧후 1:4), 비로소 내면적 대립이 시작된다. 거듭나기 이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으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에 아주 무감각하였다. 성령님께서 그의 빛을 우리의 사악한 심령에 비추기 전까지는 우리 속에 있는 죄악의 깊이와 능력을 깨닫지 못한다.

때때로 신자들은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어떠한 경향이나 욕구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다. 종교학 교수는 이 체험이 가져다주는 두 본성 사이의 갈등이나 내면의 부패가 지속되는 개념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중생하지 못한 자는 전적으로 육신의 지배 아래 있으며, 그는 그것의 탐욕을 섬기며 그 뜻을 따라 행한다. '육' 은 그 종속물들과 싸우비 아니하고, 다만 그것들으 지배한다. 그러나 우리가 새 본성을 받자마자 갈등이 시작된다.

아말렉을 공격한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이 아말렉이라고 지적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신자들 속에 있는 새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 먹기를 즐거워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좋아하며 영적인 일에 종사한다.

그러나 육은 그를 평화롭게 살도록 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마귀는 신자들의 즐거움을 앗아가기를 좋아하며 육으로 그의 극악한 계획을 달성하도록 추구한다. 그 대형(antitype)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갈라디아서 5:17에서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르고" 라고 처음으로 말하지만, 그 반대는 아니다.

Arthur W. Pink 출애굽기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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