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Exodus 122] 본문

강해시리즈/출애굽기 강해 (Gleanings In Exodus)

[Exodus 122]

En Hakkore 2024. 6. 19. 11:27

이스라엘의 노래(출애굽기 15장).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에게 한 처소(개역한글성경에는 이 말이 없음)를 예비할 것이라"(출 15:2).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진실한 헌신의 영이 여기에 표현되고 있다. '처소'란 거하는 곳을 말한다. 그것은 그들의 심령이 원하는 바 그들 가운데 계신 여호와의 임재를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이 구속한 자들과 늘 그렇게 함께 하는 것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자와 교제를 즐기는 것이 아닌가! 사실상, 지금이라도 주님과 더불어 연합함을 즐기는 것이 우리의 행복한 특권이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제를 방해하고 망가뜨리는 모든 것이 영원히 제거될 때에 그 영혼은 동경하게 된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

복되게도 말씀의 너머에 우리의 소망의 온전한 실현이 있을 것이다. 그때에는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 4).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 15:3).

이는 오늘날 거의 무시해 버리는 하나님의 성품의 일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사랑이심과 마찬가지로 '빛' 이시며(요일 1:5), 오래 참으시고 자비로우심 뿐만 아니라 거룩하고 의로우시다. 그리고 그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시고 그가 의로우시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을 징계하신다.

이는 곧 우리들이 기뻐해야 할 일이다. 만일 그가 그렇지 않다면 그에게 뭔가가 잘못된 것이다. 이 거룩한 온전성을 믿고 묵상하는 일에 움찔거리며 겁내는 것은 육신적인 병약한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홍해에서의 이스라엘은 이와는 아주 딴판이었다.

하나님은 주님을 외람되게 경멸한 자들을 심판으로 다스리셨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들은 거룩한 통찰력으로써 사물을 통찰하였다. 그들은 바로가 그 군대를 하나님의 원수로 생각했지 그들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니이다"(출 15:7).

이와 동일한 사실이 요한계시록 18, 19장에 기록되어 있다. 바벨론이 하나님의 가공할만한 재앙들로 멸망한 직후에 이르시기를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계 19:1-3).

여기에서의 이스라엘의 정서는 대부분의 현대인을 지배하는 것들과 전혀 다르다. 그들이 여호와를 용사로 나타낸 의미는 다음에 있는 그들의 노래 가운데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

그들은 이 거룩한 심판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일종의 반영으로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주님의 완전하심이 발휘되는 것으로 보았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니이다"(출 15:6, 7)라고 한 말은 그들의 고백이었다.

현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의 '앙심을 품은 환희' 에 대하여 헤아릴 수 없는 말로 그들이 저주했다고 말하면서 이스라엘을 서슴지 않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스라엘이 여기에 표현한 하나님에 대한 개념으로 인하여, 우리는 가장 잔인한 야만인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못 표현하지 아니함은 그것이 그들의 육신적 느낌에 대한 발언이 아니라는 사실이 요한계시록 15:3에서 하늘에 있는 성도들의 노래에 의하여 명백히 나타난다.

거기에 이르시기를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라고 하였다. 하늘에는 분명히 육신의 나타남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Arthur W. Pink 출애굽기 p214

'강해시리즈 > 출애굽기 강해 (Gleanings In Exodu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odus 124]  (0) 2024.06.19
[Exodus 123]  (0) 2024.06.19
[Exodus 121]  (0) 2024.06.19
Exodus 120]  (0) 2024.06.19
[Exodus 119]  (0) 2024.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