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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17] 위대한 명령(여호수아 1:1-9) 본문

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17] 위대한 명령(여호수아 1:1-9)

En Hakkore 2024. 2. 11. 10:24

앞의 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책의 내용들은 두 가지로 - 출발과 전진으로, 또한 죄인에게와 성도에게 - 적용할 수 있다. 이 점은 성경 정경 속에서 여호수아서가 차지하는 위치에서도 암시된다고 믿는다.

여호수아서는 이중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즉, 모세오경 다음에 위치하면서도, 그것과 연결되어 있고, 동시에 역사서의 시작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는 여호수아서의 내용이 지니는 이중적인 영적 의의를 강하게 암시해 준다.

가나안 땅에 대해서 모세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이렇게 말씀한 바 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신 12:9).

광야에서 방황하던 시절과는 대조적으로 가나안은 그들의 "안식"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경험에 있어서는 그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힘겨운 싸움의 세월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양심의 평안과 영혼의 안식이 그의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런데도 육과 영 사이의 맹렬한 싸움이 이제 겨우 시작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싸움이 끝나고 주님을 신뢰하게 될 때에 그리스도인은 영혼의 안식을 누리게 되는데 이는 그분의 기업의 보증이요, 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완전하고도 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첫 행위로 말미암아 "값 주고 산 소유"에 대해 빼앗길 수 없는 권리를 갖게 된다. 하지만 실제 거기에 들어가는 일은 아직 미래에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자기 기업을 누리며"(옵 17), 믿음으로 그것들을 누리며, 소망 중에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은 그의 특권이요 의무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게 주신 그 풍성한 기업의 몫을 믿음으로 사용하며 현 세상에서 누리며 사는 것이야말로 그의 특권이요 의무인 것이다. 그러나 육체와 세상과 마귀가 대적할 것이며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소유를 현세에서 누리지 못하도록 가로막고자 한다.

성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주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마귀가 혐오하는 것은 없다. 그러니 직접적으로, 또한 내주하는 죄나 이 세상의 유혹과 갖가지 근심거리들을 통해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그 권리들을 빼앗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육체를 죽이고, 끈질기게 마귀를 대적하고, 믿음의 삶을 살고 순종하며 행하면, 우리 자신도, 사탄도, 세상도 다 이길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그 땅이 황폐하게 됨으로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출 23:29-30).

하나님이 아무렇게나 행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백성을 사랑으로 돌아보시며 세심하게 행하시는 분이심을 여기서 잘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근시안적인 사고로 그들이 가나안의 경계를 넘어 들어간 지 불과 몇 개월 안에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들을 멸절시키신다면 그의 자비하심이 더 확실히 그러나게 될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도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도 최선이 아니었다.

악한 우상 숭배자들은 물론 야생 짐승들이 그 땅에 있었는데, 그 우상 숭배자들이 다 사라진다 해도, 이스라엘은 그 땅 전체를 적절히 지배하기에는 아직 숫자가 너무 적어서 그들의 인구가 충분히 늘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더 나아가, 가나안 족속을 그들의 앞에서 "조금씩" 쫓아냄으로써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처지에 있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대하시는 모든 일에 결부되는 그분의 주요 의도 중 하나이니, 곧 자기를 의지하는 데에서 벗어나게 하고 더욱 더 여호와께 기대도록 가르치는 것이 그것이다.🫰

이를 그리스도인에게 영적으로 적용시키는 일은 단순하고도 유익하다. 하나님은 그 어디서도 모든 그분의 원수들을 단번에 무찔러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일이 없다. 그러니 그런 일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설사 그가 그리 행하신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에게는 결코, 유익이 없고, 오히려 곧바로 자긍심만 높이는 계기가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사 30:18).🫰

그가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많지만 지금은 우리가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고(요 16:12), 우리에게 갖가지 승리들을 주실 수도 있으나 우리가 그것들을 누리기에 합당치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무력의 효과가 더디 나타나는 것에 실망해서는 안 되었듯이, 우리 역시 승리가 곧바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고 망연자실해서는 안 될 것이고, 우리에게는 결코, 승리가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의 소유물들을 소유하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기업을 얻고 그것을 실제로 누리는 일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 "조금씩" - 경험한다.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일은 새로운 중생처럼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 어쩌면 여러분 중에 요단 강을 건너기 전 여호와께서 하신 또 다른 말씀을 떠올리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신 9:3).

그러나 이 본문이 출애굽기 23장의 본문과 전혀 모순이 없다는 것은 구태여 논할 필요조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는 "모순"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두 본문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출애굽기 23:29의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라는 말씀은 그 앞 절에서 나타나듯이 히위 족속, 가나안 족속, 헷 족속을 지칭하는 내용인 반면에, 신명기 9:3의 "그들"은 2절에서 나타나듯이 아낙 자손을 지칭한다.

이를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전혀 아무 어려움이 없다. 그리스도인이 "속히" 극복할 수 있는 원수들이 있고, 또한 이 땅의 삶의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시험거리가 되는 다른 원수들이 있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