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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14] 위대한 명령(여호수아 1:1-9) 본문

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14] 위대한 명령(여호수아 1:1-9)

En Hakkore 2024. 2. 10. 12:43

1. 믿음에의 부름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수 1:1).

이 절의 첫 단어를 올바로 번역하면, 성경의 축자 영감을 시사해 주는 한 가지 실마리를 보여 준다. 그것을 제대로 번역하면 "그리고" 라 한다(개역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음. 역주). 영감을 받지 않은 저자라면 과연 자신의 책의 첫머리에 그런 접속사를 붙이는 것을 생각할 수나 있었을까?

존 우카르트(John Urquhart)는 자신의 '성경, 그 구조와 목적'(The Bible Its Structure and Purpose) 제 1권에서 바로 이 특징을 지적한다.

구약의 많은 책이 "베"(그리고)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는 점이 아주 미세하면서도 상당히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는 물론 그렇게 시작하는 그 책이 그 앞의 책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사실상 그 속편들임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사실은 그보다 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곧 상당수의 책이 "그리고"로 시작한다는 것은 그 책들이 여러 권의 책이 아니라 한 권의 여러 장(章)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여러 권의 책이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통해 하나로 묶여져 있다는 것은 그 책들이 근본적으로 하나임을 보여 주는 힌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한 분 저자께서 그 책들을 저작하셨으며 한 가지 믿음의 법칙이 거기에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창세기에는 맨 첫 절에 "그리고"가 붙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는 그 책이 성경의 첫 번째 책 혹은 첫 번째 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애굽기는 바로 이 접속사 "베" - "그리고" -로 시작한다(개역개정에는 나타나지 않음. 역주).

레위기도, 민수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첫 권들이 서로 떨어질 수 없도록 하나로 엮어져 있고, 그렇게 해서 성경의 첫 단원을 이룬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우카르트가 지적했듯이, "앞의 네 권을 완성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신명기가 사실 그 책들과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은 언뜻 보면 매우 의아스럽다"

그는 그런 변화 혹은 차이가 신적인 감동을 입증해 주는 하나의 계획된 증거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신명기가 모세오경을 완성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그 사실이야말로,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의 책이 유대인들의 영감되지 않은 저작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 공동 작업을 통해 기록되었고, 그 다섯 번째 책은 그 앞의 책들과 일치되도록 기록된 것이라는 - 논지를 뒷받침해 준다.

신명기 초두에"그리고"가 빠져 있다는 사실은 그 책이 그 앞의 책들의 부록이 아니고, 오히려 구약성경의 새로운 시작, 혹은 새로운 단원이라는 것을 곧바로 시사해 준다. 신명기는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앞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내용을 면밀히 공부해 보면 이 점이 입증될 것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여호수아가 "그리고"로 시작되며, 역대기상에 이르기까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책마다 그렇게 시작된다! 이러한 특징을 지적했으니, 잠시 멈추고 그 의의를 살펴보자. 성경의 처음 네 권의 책은 그리고 그 다음 여덟 권의 책은 어째서 서로 그렇게 연결되어 있을까?

그리고 신명기는 어째서 첫째 그룹이 아니라 둘째 그룹에 속할까? 그 해답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구약성경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첫 네 권의 책은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약속된 그 땅 밖에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역사를 제시해 주며, 그 다음 여덟 책은 그 땅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를 다루는 것이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소유가 다가오는 것을 예상하는 가운데, 그 민족의 과거 역사를 다시 조감하여 그들이 그 땅에서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알려 준다.

"(그리고)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수 1:1).

이스라엘의 우두머리였던 모세가 죽은 것은 그들에게 큰 손실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는 그들의 지도자였고 입법자였다. 그들이 그 잔인한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받은 것도 그분의 영도 아래 이루어진 일이다. 길이 열려 그들이 홍해를 건너게 된 것도 그분의 기도가 응답된 덕분이었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는 그들의 대변자로 행하였고 그들 앞에서는 여호와의 대언자의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떄로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고 긍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 이스라엘은 그를 존경했고 신뢰했다.

이제 이스라엘은 과거 어느 때보다 그가 더 필요한 것 같은 그런 상황에 처하여 있었다. 그들은 이제 실질적으로 전투 경험도 무기도 거의 없는 처지에서 "가나안 땅 일곱 족속"(행 13:19)과 맞붙어 싸워야 할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그들의 군대장관이 될 수가 없었다. 죽음이 그를 데려 간 것이다. 육신적으로 보면 이는 깊은 미스터리요, 지극히 아픈 섭리요, 그들의 믿음에 대한 쓰라린 시련이었다. 그들이 이를 아주 예민하게 느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신 34:8).

"(그리고)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수 1:1-2).

하나님의 일은 그분의 종들의 죽음에도 전혀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 종들이 아무리 탁월하게 직무를 담당했고, 아무리 그분의 백성들에게 복이 되었다 해도 말이다. 일꾼들이 사라진다 해도, 하나님의 일은 그 예정된 완성을 향해 전진하는 법이다.

"하나님이 일손을 바꾸시는 것은 그가 어느 한 도구에 묶이지 않으시고 그 어떠한 도구라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함이다"(헨리 Henry).

그렇다고 해서 한 교회가 목회자가 죽을 경우에 반드시 또 다른 목회자를 주신다는 뜻은 아니다. 그 곳에서의 하나님의 일이 종결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혹은 이 잡지(즉, 핑크가 매월 발행한 '성경 연구'지를 뜻함, 역주)의 사역이 종결될 하나님의 때가 올 때에 그가 또 다른 사역을 마련하실 것이라는 뜻도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 땅에서 그분의 대의를 이루시고 그분의 백성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이 어둔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호수아가 스스로 나서서 모세가 떠남으로써 생긴 공백을 채우려 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명령하시기까지 기다렸다는 점이다. 여호수아가 그의 전임자 모세와 유지했던 관계는 그냥 관심이 가는 것만이 아니라 깊은 중요성을 지닌 사안이요, 그저 역사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모형론적이며 교리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상세하 다루어야 하겠으나, 여러분 중에 과연 우리가 본론으로 들어가게 되겠는지를 궁금해 할 분들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미 세 차례나 논고를 썼는데 아직도 여호수아서의 첫 절들을 다루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 논고들이 교훈적이고 유익하다면 그게 무슨 문제이겠는가라고 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주제에 관한 내용은 잠시 미루도록 하겠다. 그리고 그 동안 먗몇 이들은 다음으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고 스스로 답변을 찾게 될 수도 있다.

여호수아와 모세와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과연 무슨 중요한 진리가 여기서 드러나고 예증되는가?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