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Hebrews 183] 본문

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183]

En Hakkore 2024. 6. 10. 11:52

끝까지 변치말라는 하나님의 요청 4(히 12:3-4)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낙심되지 않기 위한 처방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무기를 집어 던지고 절망적으로 항복할 정도로 영원히 "피곤"해지는 것을 막아주는 버팀목이다. 그 분을 생각한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요, 믿음의 "양식"이요, 믿음의 "지탱자"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부지런히 숙고함을 의미한다.♥

그가 당하신 무한한 시련과 질고와 수모와 고통과, 우리가 현재에 당하는 역경을 서로 비교 유추해 봄으로서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 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을 우리 자신들에게 합당하게 적용시키는 것이 바로 그 분을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여정 속에 잠시동안의 고난을 받아야 한다면, 더욱 무한한 시련의 체험을 우리보다 앞서 하신 그리스도를 주목하자. 그가 "견뎌내신 것"과,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 사이를 비교해 보자. 그러면 불평한다는 것이 정말 부끄러워질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깊이 생각하며 그를 본받자 - 자기 원수들을 보면서 울고,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그 분의 온유함을 바라보라!

"너희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너희"는 이 편지를 처음 받아 보았던 히브리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리스도에게 충성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면에서 혹독한 고난을 받았다. 그들이 이미 무엇을 참아내야 했는지를 10:32-34에서 분명하게 언급된 바 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란으로써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니라".

그처럼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 사회의 불신하는 형제들로 말미암아 지독한 압제를 당했다. 그래서 앞절에서 권면과 경고를 그런 식으로 했던 것이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여기 고난받는 형제들을 향해서 사도가 제시하는 두번째 생각 자료가 있다. 구주께서 만나셨던 훨씬 더 큰 대적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고난은 그들이 지금까지 당했거나, 앞으로고 받을 수 있는 것만큼은 혹독하지는 않았다.

이 논리는 더 큰 것에서 작은 것을 유추하는 논증으로 이루어진 진술이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의 상태를 비교함으로서 논증하고 있다. 그보다 덜한 고난 아래서도 낙심한다면 맞아 죽을 최상의 시금석 앞에 섰을 때에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된 마음에서 떨어지지 않으리라 누가 단언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 역시 동일한 척도를 정직하게 대면해 보아야 한다. 친절치 못한 말이나 욕설이 지금 우리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면, 순교자의 죽음을 맞으라고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뒤로 물러갈까!

압박받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의 상태를 여기에서는 "너희가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고 말함으로서 부정적으로 표현한다. 실로 그들은 이미 여러 형태의 고난을 맛보았고 당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부르심을 받지는 않은 것이다.

히브리서 10:32,34가 분명히 시사해 주는 바와 같이, 그들은 첫번째 시련의 무대 기간동안 멋지게 해냈다. 그러나 그들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에 넣을 필요가 있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눅 18:1). 그리고 성령의 권면이 나타난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너희가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여기서 사도는 히브리인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견뎌내야 할 것이 무엇임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피를 흘려 무참하게 죽는 일도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 돌로 맞거나 칼로 찌르거나 불에 태워 죽을 일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악마 같은 핍박자들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고통거리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몸을 죽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한계를 정해 놓으셨다. 아무도 오는 세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거나 해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서 섬기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 때문에 피를 보는 극도의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원수들이 항상 원했던 것이 바로 그처럼 그리스도인들을 피흘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앉아서 비용을 계산하라"고 명하신다(눅 14:28). 다시 말하면 당신의 제자들에게 드는 댓가가 어떠한 것인가를 미리 계산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찬미와,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이 준 영예를 위해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도록 뜻을 정해 놓으셨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죄"를 여기서 의인화시키고 있다. 싸워 이겨야 하는 대적으로 표현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많은 핍박과 역경과 고난과 고통을 겪게 되는데, 그러한 것들은 우리를 방해하고 넘어지게 하려는 죄의 기회와 방편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싸우라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사도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에서 행해지는 경기를 생각하면서, 달음박질하는 경주에서 전투로 그 장면을 바꾸어 나간다. 신자의 마음 속에는 은혜와 죄, 육체와 영 간의 큰 싸움이 있다(갈 5:17).

죄는 믿음을 꺼버리려 하며 순종을 죽이려 한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의 생존이 달려 있는 까닭에 죄는 싸워 이겨야 하는 존재이다. 죽음을 걸고 싸우는 경기에서 태만할 틈이 없는 것이다. 그 어떠한 휴가도 허락되지 않는다!

"죄와 싸우되"(죄와 사투하되).

히브리 사람들은 배도의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싸우고 있었다. 그 배도는 죄의 모든 상세한 부분까지 영향을 미치며 -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을 포기케 만드는 것이다.

내주해 있는 죄는 부패성과 핍박을 방편으로 사용하려고 애를 쓰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죽이려고 할 때에 그 부패성이 쉽게 채용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죄와 싸움에서 피곤하지 않도록 싸우는 일을 통해서 그 무서운 사단을 부단히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사도와 같이 말하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 21:13). 그러나 그러한 영원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 매일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가까이 동행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작은 시련을 참아내야 하는 일이 항상 있어야 한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렘 12:5)♥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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