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Hebrews 158] 본문

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158]

En Hakkore 2024. 6. 9. 10:37

믿음의 정점 3(히 11:35-36)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어떤 사람들은 이 소절이 34절 끝에 오지 않았다고 불만을 늘어놓는다. 그들은 35절이 33,34절에서 열거한 믿음의 여러 이적적인 승리를 더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부분이므로 이 소절이 35절의 초두에 오는 것보다 34절 끝에 오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앞서 나열된 특별한 사람들이 여러 종류의 이적들에 속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것이 35절에서 38절 사이의 내용의 머리에 놓여 있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항목에서 저 항목으로 넘어가는 합당한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면에서 그러하다: 그 여인들은 지독한 고난을 받고 살 희망까지 포기한 고통을 겪은 다음에 자기들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다시 받았던 것이다 -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그들의 친절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상급이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열왕기상 17:22-24, 열왕기하 4:35-37에 기록된 역사적인 사건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주목할 만한 역사적인 실례들은 믿음이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따라서 행할 때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그 믿음은 반드시 효력을 나타낸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놀랍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영적으로 적용시키면 어떠하겠는가? 그것은 성령께서 사모하는 은혜를 늘 새롭게 하시기를 추구하는 믿음의 모습이 아닌가?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계 3:2)는 말씀을 실제적으로 주목해 보라!

아니면 보다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한다면, 겉으로 보기에 완전히 거듭나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버린 것 같은 낙망한 그리스도인에게 소망하는 말씀이 아닌가? 그것은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말씀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 아닌가!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이 말씀은 처음 기록한 그 손이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고문을 행할 때 함께 참여하였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감동적이다(행 8:3, 9:1). 그러나 우리로 말미암아 그는 이제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었다(고후 11:24-27).

"악형"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은 여기서 "고문 틀에 넣어 억지로 사람의 몸을 늘여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것"의 의미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어떤 장치에 묶어놓고 나사를 돌려 압력을 가하여 관절을 탈골시키는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

그 악마 같은 로마의 사람들이 중세에 프로테스탄트인으로 하여금 억지로 희망을 버리게 하려고 바로 그러한 방법을 쓰는 경우가 잤았다. 이러한 무서움 고난의 형태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은혜는 시험을 받았고 시련에 처해졌다.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살려주겠다는 제안이 왔으나 믿음을 버리는 조건으로 그러한 제안이 온 것이다. 그들 앞에 두 길이 주어진 것이다. 주님께 대하여 배반하느냐, 아니면 가장 극한 고난을 감내하느냐, 진리에 복종하느냐, 아니면 인간의 탈을 쓴 마귀에 의해서 고문을 당하느냐!

이러한 고문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그들의 신앙고백을 버려야 했다. 마카베오서에 기록된 엘리에서와 그의 일곱 형제들에 관해서 이 점이 분명히 증거되었다. 그들에게 큰 상급과 대단한 호의가 약속되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완강히 거절했다.

하나님의 성도들 앞에 고문틀을 가져다 놓고 악을 행하려는 사단들의 가장 주요한 의도는 그들의 몸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죽이려는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믿음을 버릴 기회가 언제나 주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들의 신앙고백을 버리도록 유인하기 위해서 위협과 함께 회유책도 썼다.

'진정한 시금석은 하나님의 성도들이 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는 문제다. 현재 육신의 편안함이냐, 아니면 그들의 영혼이 영혼토록 복락을 누리는 것이냐? 그 사람들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들임을 잊지 알아야 한다.

그들의 몸도 우리와 똑같은 부드럽고 아픔을 쉽게 느끼는 육체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존귀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들의 영혼이었다. 그들의 믿음과 더 나은 부활에 대한 소망이 진실했기 때문에 겉사람의 호소와 간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도 형태는 다르지만 그러한 제안들이 그리스도인 앞에 주어진다. 안타깝게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비열한 몸의 잠시적인 유익을 위해서 자기들의 영혼을 영원토록 버리고 있다.

사랑하는이여, 그들은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 것인가, 몸이냐 영혼이냐? 여러분의 "행동거지"가 그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둘 중 어느 것을 더 생각하고 어느 것을 더 염려하고 어느 것에 더 주목하는가, 둘 중 어느 것을 "부인하는가". 어느 것을 더 영광스럽게 생각하는가.

Arthur W. Pink 히브리서 상해 II p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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