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Hebrews 138] 본문

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138]

En Hakkore 2024. 6. 7. 15:13

이스라엘의 믿음 2(히 11:30)

우리 시대에 그와 동일한 복음적 승리를 목격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어째서 로마주의가 그 잃어버린 땅을 다시 찾아 많은 곳에서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가? 어째서 "외국 땅에" 사단의 세력이 물러가기는커녕 더욱 더 번창하고 있는가? 어째서 소위 기독교 나라라고 하는 곳에서 여리고 백성들이 점점 많아지며 성도들의 기도와 노력을 비웃고 있는가?

하나님 능력이 부족해서인가? 정말 그러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성경이 20세기의 필요에 부응하지 못하고 뒤떨어진 것이기 때문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 마음 속이 성령을 근심케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성령의 능력이 철회된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소멸되었다"(살전 5:19).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아무리 애를 쓰고 열심을 부린다 할지라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어째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근심하시는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소멸" 시킨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떠난 데에 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대신 인간적인 꾀를 좇았으며, 우리의 육신적인 무기를 신뢰한 까닭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여리고 성벽을 도는 대신, 우리는 세상적인 유혹에 호소했으며, 육신적인 매력을 통해서 가나안 땅을 이기려고 했던 것이다.

형제들이여,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본을 따르기 전에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얻기를 바랄 수 없다. 우리가 진실로 사도의 방식들을 따르기 전에는 사도들의 행로로 돌아가는 것은 다시 목격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신 그 내용을 인식하기 전에는 어떠한 개선도 있을 수 없다(슥 4:6).♥

우리가 순종의 길에 들어서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식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며, 확신있게 하나님께 나아가 그러한 노력을 존귀케 하시며 복주십사 하고 간구하기 전에는, 성령의 능력이 우리 속에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서 배워야 할 뛰어난 교훈이 우리 본문 속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사랑에 의해서 선택된 믿음이 그 사건의 통로가 되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만이 위대한 기사를 행하신다. 그러나 그 성도들의 믿음을 통해서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든 승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그 기념할 만한 밤에 그들을 구속했다. 그러나 유월절을 지키고 피를 뿌렸던 것은 모세의 믿음이었다. 홍해를 가르시는 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요한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여 그러한 일을 하셨다.

복음서에 기록된 모든 치유의 이적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예수께서 당신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그런 다음에  물고기와 보리떡 다섯개로 수천명을 먹이셨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에바다 열릴지어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언제나 들어주심을 믿음으로 감사하고 나서 그 전능하신 능력의 말씀으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셨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사람들 속에서 행사되기도 한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느니라'. '믿음으로 될지어다'. 그리스도께서는 흔히 그러한 말씀을 하셨다.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은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믿지 않기 때문에 어떤 곳에서는 예수님이 많은 이적을 행하지 아니하신다.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구원의 은혜와 사랑의 믿음을 말하는 역사이다. 이적은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믿음은 땅에서부터 올라온다. 아브라함의 선택에서 모세의 탄생까지, 유월절과 홍해에서부터 요단 강을 가르기까지의 모든 것들은 다 이적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어떤 선택된 성도의 믿음을 통해서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여리고 성앞에 이르렀다. 그들이 그것을 함락시킨 것은 힘과 능력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였다"(A. Saphir).

우리는 이 기억할 만한 기회를 통해서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믿음의 여러 국면들'을 숙고해 보자.

1. 믿음의 "모험성"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에 말하자면 그들은 자기들의 다리와 보트들은 자기들 뒤에 던져 불살라 버릴 것이다. 그들은 도망할 길도 없었다. 그들이 들어가 쉴 집도 없었고, 그들이 피해갈 성채도 없었다. 그들은 원수의 땅에 있었고, 승리냐 죽음이냐는 것만이 남아 있었다.

여리고 성벽 주위를 평화롭고 고요하게 행진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처럼 보였을 것이다. 가나안 사람들이 화살을 쏜다든지 자위를 그들에게 내려 던지려 한다면 무엇이 그들을 막겠는가. 그것은 실로 믿음의 모험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모험심 어린 믿음을 존귀케 하시기를 기뻐하신다. 불신앙은 주저하고 겁을 먹는다. 그러나 담대한 믿음은 확신과 용기를 가진다. "주 안에서 강하여지고 그 힘과 능력으로 강하여지라".

믿음은 세 단계가 있다. "받는" 믿음이다. 아무것도 없는 거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께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다(요 1:12). 또한 "여기는" 믿음이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우리를 위해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여기는 믿음이다(딤후 1:12).

또한 "위험"을 무릎쓰는 믿음이 있다.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감히 행하는 믿음이다. 모세는 애굽 왕에게 나아가서 감히 여호와의 명령을 알렸을 때에 바로 그러한 믿음의 국면을 모본으로 보였다. 이 모험을 무릎쓴 믿음은 다윗에게 의해서도 드러났다. 그는 골리앗과 싸우러 나갔던 것이다.

엘리야를 통해서도 그 믿음을 본다. 그는 갈멜 산상에서 이 세대의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을 혼자 맞아 싸웠다. 다니엘이 우상을 섬기라는 바벨론 왕의 중명에 타협하기보다는 사자굴에 던져질 것을 감히 선택했을 때에 그러한 믿음을 보인 것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에서 그러한 것들을 바라본다. 그는 그리스도의 말로 할 수 없는 부요를 알리기 위해서 어떠한 면으로 상상해 보아도 위험천만한 상황 앞에서 움추려 들지 않았다.♥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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