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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brews 92] 본문

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92]

En Hakkore 2024. 6. 4. 12:19

아브라함의 믿음 7(히 11:17~19)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사도가 이 말을 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어디 있었느냐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첫째, 그는 자기의 아들이요 상속자 된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둘째, 그 명령을 받되 "약속을 받은" 뒤였다.
셋째, 이스마엘이 아니라 자기의 "독생자", 또는 지극히 사랑하는 이삭이었다 - 바로 그것이 그 표현의 강조적인 내용이다. 요한복음 1:18;3:16의 경우가 보여 주듯이 그것은 애정의 차원이다.
넷째, 그는 메시야께서 친히 나오실 혈통이 되는 자를 죽여야 한다. 왜냐하면 18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가 명백하게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죤 오웬은, 소시니안들(유니테리언, 일신론자들)이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두 방면에서 내리뜨리운 사실을 환기시켰다.

첫째, 후손들이 많다는 것과, 둘째, 이 후손들이 한 기업으로 가나안 땅을 물려받고 누릴 것이라는 사실의 측면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웬이 지적하였듯이 그것은 사도의 말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사도는 히브리서 11:39에서 다음과 같이 확언하여 말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도 내에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약속 성취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  우리는 현재의 '세대주의자들'이 그 구절을 숙고했으면 좋겠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수가 많았으며, 그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였다는 것이 그 약속을 이루는 방편과 증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도행전 2:38,39 ; 갈라디아서 3:16은 그 약속의 주요 명제는 그리스도 자신이요, 그리스도의 교회의 구속과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가 감당할 중보사역임을 명백히 한다.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창세기 21:12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처음 발견된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경우는 약속의 의미를 명확히 알아내는데 또 다른 도움을 준다. 그 문맥에서 보면, 여호와께서 하갈과 그녀의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창 21:11)라는 말씀이 있다.

여호와께서 그의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은 그의 깊이 상심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하갈의 아들 때문에 근심하지 말라 내가 백만의 이스마엘보다도 더 나은 자를 네게 주리라. 내가 네게 줄 그 아들에게서 다른아닌 약속된 구주요 구속자 되신 분이 나오리라'.♥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은 메시야의 구별된 선조인 이삭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명령앞에서 보통의 믿음을 가지고는 결코 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사단에 의해서 심히 압력을 받았을 것임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일관성 없느냐'고 그 사단이 지적하지 않았겠는가! -

사단의 비열한 참소에 귀를 기울일 만큼 우리가 어리석다면 늘 사단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단이 아브라함의 감성에 호소하면서, 네가 사라는 너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말하지 않았겠는가! 하나님께서 너를 희롱하고 계시며, 사실 그러한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계시지 않다고 아브라함을 설득하려 들지 않았겠는가?

의로운 아버지더러 자기의 착한 아들을 죽이라고 요구할 정도로 그처럼 잔인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설득하려들지 않았겠는가? 성경에 나타나는 우리의 대적 원수에 대하여 계시된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아브라함이 마귀의 직접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음을 의심할 자가 누구이겠는가!

아, 마음을 주께 두지 않았더라면 마귀를 대적지 못했을 것이고, 그처럼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그가 믿음이 약했었다면 언뜻 보기에 모순되어 보이는 두 계시가 어떻게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올 수 있었을까를 의심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두 계시가 같은 하나님에게서 나올 수 있었다 할지라도, 그러한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하고 복종하겠는가라고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강하여져서 다음과 같은 식으로 논증했다.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명령이다. 나는 그것에 대한 만족할 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명령을 즉각적으로 서슴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이야말로 완전하게 지혜롭고 의로우심을 안다. 그가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틀림없이 옳다.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여러 가지 약속들을 이루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들을 없애버리는 길 같다.

나는 하나님이 그러한 약속들을 주셨음을 확신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들을 이루실 것을 확신한다. 나는 그가 그 약속들을 어떻게 이루실까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을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약속은 하나님이 하시고, 믿기는 내가 한다. 명령은 하나님이 하시고 나는 순종할 뿐이다"(J. Brown).♥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사건은 거듭해서,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뿐 아니라 하나님의 교훈들과도 관계함을 보여 준다.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뿐 아니라 하나님의 교훈들과도 관계함을 보여 준다. 아니, 그 점이야말로 여기서 제시되는 중심적인 요점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이 많은 아내를 통해서 아들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믿음에 견고하여졌다"(롬 4:20)♥. 언뜻 보기에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난제가 버티고 서 있었지만, 그것을 보고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죽이라고 명하신 지금에도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 명령을 순종하는 그의 행동은, 이삭으로 말미암은 "후손"을 얻기 전에 제거할 수 없는 장애물을 들여오는 것 같았지만 아브라함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아, 사랑하는이여, 다음의 요점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서 만큼 하나님의 훈계에 대해서 동등하게 진실한 충성을 보이지 않는 믿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영적인 믿음은 어느 것을 골라서만 취급하지 않는다. 그 영적인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마음을 육신적인 허만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실패하여 그 약속들이 제공하는 행복을 추구하지 못한다면, 살아 있는 믿음으로 그 약속을 믿을 수 없다. 그와 같이 계명들을, 약속된 행복을 얻도록 인도하는 오직 유일한 법칙으로 알고 따르며, 집착하여 순종해야겠다는 다부진 마음의 결심을 하지 않는 한, 바르게 믿을 수 없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다'"(119:66)라고 선언했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들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지했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들 속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마음의 채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계명들로 자기의 행동을 규제할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아브라함도 그러했다.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증거를 보이려면 우리도 그래야 한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거늘"(요 3:38).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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