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Hebrews 81] 본문

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81]

En Hakkore 2024. 6. 4. 12:12

믿음의 상급 1(히 11:15,16)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하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1:15,16).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서신을 처음 받았던 성도들의 특별한 처지를 상기해야겠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이 서신의 내용을 분변할 가장 좋은 위치에 서게 되며, 그 내용을 우리 자신에게 가장 적확하게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히브리 사람들은 육체를 따라서 유대인들이고, 우리는 육체를 따라서 이방인들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와 한결같이 "거룩한 형제들, 하늘의 부르심에 참예한 자들"이기 때문이다(3:1). 아니, 우리는 그들을 유혹했던 강력한 시험과 더불어 그들이 처했던 특별한 입장을 주의깊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성전이 아직도 견재해 있었고, 그 성전에서 섬기는 일들이 계속 되고 있었기에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이다.
그 역사적인 상황은 도덕적인 상황을 그대로 표출해 내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나와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았고, 그 심판에 의해서 소멸되지도 않았다. 아니, 세상은 여전히 건재해 있고 우리는 그 세상 안에 있다. 그리고 또한 사단은 우리를 그 세상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구절들의 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상황이다. 방금 말한 것을 염두해 둔다면, 사도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려는 이유를 분변하는 데 별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첫째는 그 족장들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이 자기들의 떠나온 본향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난 강론에서 보았듯이, 족장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교제하지 않고 "장막에서 우거"한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포기하는 것을 모형적으로 그려주었다. 그 족장들이 갈대아로 돌아가기를 싫어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세상을 단념하고 하늘을 향해서 계속 경주해야함을 예표했다.♥

이제 우리가 알아 보려는 구절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진수가 되는 요소를 명백히 밝혀 준다. 본문은 오늘날 어떤 교파에서는 크게 무시되거나 부인당하는 진리의 한 국면을 보여준다. 성도들의 영원한 구원의 복된 진리를,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닌 열심으로 강조해 왔던 자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보전하시되 그 백성들이 사용하는 방편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식으로 그 진리를 표현했던 것이다. 사실상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부인하는 방식으로 진술한 것이다.

마치 은행이나 정부의 예금 구좌에 돈을 맡겨 놓으면 더 이상 그 돈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는것처럼, 일단 내 영혼을 주께서 맡아 주십사고 부탁하면 그 영혼의 안전성에 대하여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다고 말한 셈이다. 그 결과로, 진리를 이처럼 거짓되게 말하는 것을 받아들였던 많은 사람들은 무분별하고 방종한 삶을 살면서도 아주 평안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방금 언급한 교훈은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쳤기 때문에, 그 교훈을 옹호하는 자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배도할 위험을 조금이라도 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하나님의 종이 그러한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하나님의 진정한 성도는 결코 멸망한 적도 없고 멸망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확언하면, 그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의 종을 일관성이 없고 비논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치와 성령의 효력적인 역사의 차원에서 볼 때. 선택함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는 것이 완전한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연약의 차원이나, 아직도 사단의 공략을 받고 있는 육체의 존재나, 악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그리스도인은 사방에서 오는 현실적인 위험(이론적이거나 상상적이 아닌 위험)을 직면하고 있음도 역시 사실이다.

그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은 바로 이 엄연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 그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신적인 측면만 있다고 상상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살펴보려는 본문은 그 교훈의 기만성을 드러내 보인다.

사도는 그 조상들이 자기들이 떠나왔던 본향으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 그 본향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모형적으로 의미할 것이다.♥ 오히려 사도는 담대하게 확언하기를(자기더러 일관성이 없다는 비난을 하든 말든 상관없이), 그들의 마음에 갈대아에 가 있었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장막에서 거하며 낯선 땅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이 지겨워 메소보다미아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면,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막았던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참으로 그렇게 했으면 그것은 불신앙과 불순종의 행동이었을 것이고, 약속을 멸시하고 포기해 버리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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