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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71]

En Hakkore 2024. 6. 3. 11:20

사라의 믿음 2(히 11:10,12)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관심을 집중시켜야 하는 다섯 가지 요점이 이 구절에 들어 있다. 첫째, 사라의 믿음을 방해했던 것들이다. 잉태하지 못함과 나이 많음과 불신앙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었다.

둘째, 그녀의 믿음이 낸 효력이다. 그녀는 잉태할 힘을 받았다.

셋째, 그녀의 믿음의 부단성이다. 그녀는 실제로 구원받기까지, 또는 어린 아이를 낳기까지 하나님을 신뢰했다.

넷째, 믿음의 기초이다. 그녀는 약속하신 하나님의 성실성을 의뢰했다.

다섯째, 그녀의 믿음이 가져온 열매였다. 그녀의 아들 이삭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후손들이 나왔다. 우리는 이 요점들을 각각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헬라어 원문이 다른 구절에서와 같으니. "믿음으로"(by faith)로 번역해야 한다.(영어 흠정역에는 'through'로 번역되어 'by'와 다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저자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 역자주). "사라 자신도"에서 "도"(역시)라는 말이 붙여진 것은 이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는, 여자들의 경우에는 은혜의 복락들과 특권들이 낮게 주어진다고 상상하는 오류를 막아주고 고쳐주기 위함이다. 물론 직무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은 여자들이 남자들을 다스리고 주장하는 권위의 자리에 서지 못하도록 하신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여자들더러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고 명하였던 것이다(고전 14:34). 또한 여자들에게는 가르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며(딤전 2:12),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라고 명하고 있다(엡 5:22).

그러나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갈 3:28). 그러므로 믿는 남편이나 믿는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으로 받은" 사람들이다.

둘째로, "사라 자신도"라 한 것은, 사라가 여자이지만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행사했음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사라는 아브라함과 함께 갈대아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서, 장막 안에서 같이 거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녀 개인적으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에 동일하게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그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같은 난관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약속된 후손의 축복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그녀에게도 주어졌으며, 아브라함에게뿐 아니라 그녀에게도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사라도 교회 앞에 한 모본으로 세워질 만하다(벧전 3:5,6). "아브라함이 믿는 사람들 또는 교회의 아버이듯이, 사라는 교회의 어미였다. 그녀는 자유한 여인으로서, 교회가 그녀에서도 났다(갈 4:22,23 참조). 모든 믿는 여자들은 그녀의 딸들이다(벧전 3:6)"(J.Owen).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자신" 이란 말이 강조적이다. 그녀는 남편의 믿음을 통해서 복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힘을 얻은 것은 남편의 믿음뿐 아니라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았다. 믿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매우 실질적이고 정말 어려운 장애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믿음을 행사했던 것이다.♥

우리가 지적했듯이 그녀의 믿음을 방해하는 것이 세 가지 있었다.

첫째, 그녀는 통례적인 출산기에는 전혀 아이를 갖지 못했다. 창세기 11:30은 "사라가 잉태하지 못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브람의 아내 사라는 생산치 못하였고"(창 16:1).

둘째, 그는 출산할 수 있는 연령보다 훨씬 더 많은 연령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그녀는 "구십 세가 되었기 때문이다"(창 17:17).

셋째, 불신앙이 일어나 그러한 조건에 처한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자연이나 이성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일이라고 설득하려 들었다. 창세기 18장에서 그 모습이 엿보인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세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난다.

그 중 한 사람이 신현적(theophanic)으로 나타나신 주님이셨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가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사라는 "속으로 웃었다". 사라의 웃음은 의심과 불신앙의 웃음이었다. 왜냐하면 사라는 "나는 노쇠하였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즉각 그녀의 불신앙을 꾸짖으시며 이렇게 다그치셨다.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15절). 잘못을 범하는 것은 수치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잘못을 부인하는 것은 더 큰 부끄러움이다.

불신앙의 길을 내주는 것은 죄악이다. 그러나 거짓말로 그 불신앙을 가리려 하는 것은 불의에 불의를 더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속이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감추어질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11과 창세기 18장에 기록된 것을 비교해 보아라. 그러면 주님께서 사라의 불신앙을 책망하신 뒤에 사라가 그 약속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식하기 시작함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뒤에 그의 믿음이 작용한다.

사라의 웃음이 약한 데서 나온 것이고 조소가 아니기 때문에, 사가랴의 불신앙을 대하실 때처럼(눅 1:20) 사라를 치지는 않으셨다.

이상의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 교훈들을 배울 수 있다. 많은 경우에서 말씀이 즉각적인 효력을 발생하지 않는다. 사라의 경우에 말씀이 그러한 즉각적인 효력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물론 그녀는 뒤에 가서 믿었으나 처음에는 웃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되풀이해서" 음미해 볼 때만이 믿음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실패로 좌절한 설교자들이나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이 점을 명심해 두어야 한다. 다시 여기서, 믿음이 견고해지기 전에 흔히 갈등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 같은 늙은이가 아이를 가진다고" - 이성은 그 약속을 반대했다. 불을 붙이면 화염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연기가 나듯이, 마음이 말씀을 의뢰하기 전에 일반적으로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일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의 결함을 얼마나 은혜롭게 감추시는가?

라합의 거짓말이나(히 11:31) 욥의 참지 못함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아니하신다(약 5:11). 또 여기에서 사라의 웃음에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 5:1,2)!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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